[13매]
얼마 전에, 유서를 썼다.
내 나이를 아는 주변인이 듣는다면 또 무슨 건방을 떠는 것이냐며 웃어넘기겠지만 사실 이건 내게 꽤 진지한 일이다. 더구나 처음도 아니고.
물론 이 유서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문구가 있다. 다른 의도가 없음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나는 천수를 다 누리길 원하고,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서두와 말미에 적어두었다. 그러니 이건 유서라기보다는 스스로 돌아보기 위한 거울과 같다. 동시에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한 문자로 된 녹음테이프기도 하고.
십 년 전 스물셋에 썼던 첫 유서는 이제 보면 가관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짠하기까지 했다. 마치 온몸으로 떠받쳐도 무거운 양동이를 서둘러 쏟아내는 모양새였으니. 아마 그 나이로 소화할 수 없음에도 무작정 주워 삼킨 것들을 종이 위에 도로 토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첫 문장부터 연필심을 꾹꾹 눌러 차분하게 적어갔다. 그러다 마침표를 찍은 자리는 세 번째 장의 마지막 줄이었다. 예상보다 늘어났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지도 않았다. 내용 대부분은 누군가에 대한 안부, 염려, 그리고 당부였다.
첫 줄부터 눈으로 훑으면서 새삼 이래도 되나 싶었다. 남은 사람은 알아서 잘 살 텐데 웬 걱정의 끈이 이리도 기나. 그래, 다시 보니 이건 걱정이 아니다. 걱정을 가장한 내 미련이지. 한숨처럼 아른거리는 미련을 물질로 바꿔놓으면 딱 이런 누렇고 너덜너덜한 종이가 될 것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새 종이를 꺼낸 나는 세 장 가득 채운 미련을 한 장으로 줄였다. 나머지 두 장은 내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훗날 나를 모르는-혹은 기억이 어렴풋한- 누군가가 나를 잘 알던 이에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라고 물었을 때 대답할 법한 그런 내용으로. 나는 평소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유난히 싫어했는지. 어떤 사람이고자 했고 그래서 정말 그렇게 살았는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과 스스로 생각한 나의 장단점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께 묻고 싶은 내용과 같다. 지금 나는 그분이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너무도 궁금하지만 이제는 직접 들을 수 없으니까.)
쓰고 보니 또 자서전이다. 달리는 것처럼 쓰면 쉬운데 천천히 걷듯이 쓰려 하니 생각보다 어렵구나. 이것마저 한 장으로 줄이니 남은 건 마지막 한 장이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연필이 멈추고 오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여기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조금 다른 얘기로 돌아가서, 사실 이 두 번째 유서는 납기가 한참이나 지났다. 첫 유서를 썼을 때, 앞으로 서른이나 마흔처럼 앞자리가 바뀌는 해마다 ‘십 년 전 내게 보내는 편지’와 ‘십 년 후 내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유서, 이 세 개를 쓰자고 결심했으니까. 하지만 서른이 되고도 삼 년이나 미루던 일을 이제라도 시작하게 된 것은 얼마 전에 꾼 꿈 때문이었다.
꿈에서 나는 푸른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철창 밖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는 재판관의 말은 건조했다. 집행은 한 시간 후였다. 재판관이 떠나고 잠시 허공을 더듬던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빗자루와 걸레였다. 간수에게 건네받은 것으로 좁은 방을 치우는 일은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아직 삼십 분이 남았다. 뭐라도 적고 싶었으나 청소 내내 흔한 종이 쪼가리 하나 나오지 않아서 나는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손이 멈추자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몹시 살고 싶었다. 눈을 감고 ‘이건 꿈일 거야, 이건 꿈이야’라고 거듭 읊조렸다. 눈을 떴을 때 내 방 침대이기를, 이 모든 상황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기를. 이마를 짚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세 번째로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였다. 다행히도 그건 정말 꿈이었다. 만약 몇 번 눈을 떴어도 여전히 차가운 의자였다면 나는 그대로 좌절했겠지. 그리고 이제 유서를 쓸 시간도, 써놓은 유서를 다시 읽어볼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절망했을 것이다. 뒤늦게 소름이 돋았다. 내 삶이 어디서 어찌 끝날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그런 절망 속에 죽고 싶지 않았고 그런 후회를 하며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이것을 쓰게 됐는지. 그 계기를 떠올리고 나니 나머지 한 장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의자에서 집행을 기다리는 마지막 삼십 분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하지만 할 수가 없었던 것들. 결국 지금껏 전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너를 사랑해. 그때 내가 미안했어.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 그 말은 진심이 아니야. 당신은 내게 이런 사람이야. 나는 당신에게 이런 것을 받았어. 이런 그동안 가지고만 있던 마음들, 하지 않아도 알 거라 넘겼던 짐작들, 흐르는 세월 속에도 잊지 않았지만 끝끝내 하지 못했던 말들. 결국 표현.
첫 장에 ‘네가 걱정돼’, 둘째 장에는 ‘나는 이래’, 마지막 장은 ‘사랑하고 미안해’까지. 아가 아닌 타, 타가 아닌 아, 그리고 그사이의 관계까지. 인생의 세 토막을 온전히 담고 나니 유서는 세 번째 장의 몇 줄만 비어있었다. 이제 남은 건 이러든 저러든 좋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뿐. 내가 남긴 유산은 어쩌라든지, 장례는 되도록 치르는 사람이 편하게 하라든지, 다만 한 가지 부탁일랑 만약 화장해서 납골한다면 죽어서도 서 있긴 싫으니 항아리 대신 넓적한 나무상자에 담아 눕혀 달라든지.
두 번째 유서는 그렇게 끝났다. 다시 읽어봐도 꽤 단출했다. 지금껏 별 아쉬움이나 미련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대부분 전하며 살았다는 뜻이리라. 이대로 접어 상자에 넣어두면 아마 누구도 보는 일 없이 마흔이 될 것이다. 그때 다시 읽어보고는 피식 웃으며 새로운 종이에 세 번째 유서를 작성하겠지.
부디 바라건대 다음에 적을 것도, 그리고 언젠가 적을 마지막 것마저 이와 같기를. 평생 단출한 유서를 쓰고, 그 유서 같은 삶을 살았기를 바라본다.
- 한국수필 2019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