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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 오인치 씨

[15매]

by 이한얼






내 고용주인 당신을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당신을 깨우는 일입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흔들어서 당신의 단잠을 방해합니다. 당신은 바로 일어날 때도 있고, 때로는 잠시 후 깨워달라며 다시 잠들고는 합니다. 이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수많은 업무 중 그나마 힘든 편에 속합니다.

눈을 뜬 당신은 내게 날짜와 시간부터 묻습니다. 그리고 무슨 요일인지, 밖의 기온은 몇 도인지, 오후에 비가 오지는 않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바쁜 일이 없다면 당신은 누운 상태로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당신이 자는 사이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인들의 연락은 없었는지. 오늘 해야 할 일은 뭔지. 주식은 올랐는지 내렸는지.

드디어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신이 아침을 먹는 동안 나는 지인에게 답장을 해주고, 그들이 볼 수 있게 올려둔 일상을 구경하게 해주고(그들은 당신이 자신의 일상을 보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티를 내지 않는 이상), 누군가 정리해둔 기사를 계속 전해줍니다. 방송과 영상을 보여주고, 사야 하는 물건 목록을 최저가로 나열해 줍니다. 나는 나가려는 당신 차에 시동을 걸어주고, 끄고 나오는 것을 깜빡한 전등을 대신 꺼주고, 당신과 함께 사는 동물이 혼자 잘 있는지 보여주기도 합니다. 나는 하루 종일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당신과 함께 붙어 다닙니다. 슈퍼에서 대신 포인트 카드를 보여주고, 카페에서 결제를 하고, 누군가의 연락처나 명함을 찾아주는 것도 내 일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당신의 추억을 보관하고, 간단한 메모도 하며, 내가 가진 서류철 어딘가에는 당신이 일일이 외우지 못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주민등록번호와 카드번호, 공인인증서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고, 당신의 운동시간과 칼로리 소모량도 알려줍니다. 모르는 외국어를 번역해주고, 시외버스표를 예매하고, 여러 개의 화살표로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계좌를 이체하고, 지하철 시간을 말해주고, 음식을 배달시키고, 서류를 스캔하기도 합니다. 당신 대신 간단한 숫자를 계산하고, 나눈 대화를 녹음하고, 심심할 때면 당신에게 만화를 보여주거나 당신과 게임을 합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갑니다. 당신이 잠이 들면 나는 당신이 깰 때까지 곁에서 기다립니다. 잠시라도 잠을 자본 것이 언제인지, 최소 3주는 넘은 것 같습니다. 졸린 내가 안색을 어둡게 하면 당황한 표정의 당신은 나를 찌르며 깨우니까요.

나는 당신에게 고용된 비서입니다. 나는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다양하고 방대합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주로 해주는 일은(반대로 당신이 내게 요구하는 대부분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지인들과의 대화를 대신 해주는 일.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그들의 일상을 알아다주는 일. 그리고 누군가가 정리해서 제공한 기사를 그대로 전해주는 일. 아, 하나가 더 있었네요. 당신의 아이와 놀아주는 일까지.

아마 그래서일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할 수 있고 예전에는 직접 하던 일을 내가 대신 하는 만큼 나에 대한 당신의 의존도가 더는 높아질 수 없는 수준까지 온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입니다. 세상은 무한히 넓어지고 예전에는 평생 보지도 닿지도 못할 장소가 믿을 수 없게 가까워졌지만 당신이 5인치 격벽에 갇혀 서서히 편협해지는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입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결혼기념일에 빈손으로 집에 오고, 20년이 넘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내가 잠든 바람에 추운 편의점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된 것은.

당신은 많은 것을 내게 넘겼고 그래서 점점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당신의 아이, 나의 작은 고용주는 더합니다. 작은 고용주가 걷고 말할 때부터 나는 당신 곁에 있었습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나오고 나서 운전을 시작한 당신이 이제 화살표와 목소리의 지시 없이는 천안에서 서울로 곧장 오지 못하고 엉뚱한 수원에서 빙빙 돌듯이, 당신의 아이는 이미 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경험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아이는 날이 갈수록 5인치 안경 너머로만 세상을 보고, 내가 알려주는 것만 배우며 자라날 것입니다. 힘을 가진 이들이 옳다고 하는 것만 긍정하고, 또래에게 인기 있는 것만 인정하며 집단 속으로 끝없이 매몰될 것입니다.

내게 감정이 있다면, 당신은 몰라도 당신의 아이는 참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함께 하듯 나 역시 그렇습니다. 나를 고용한 장점도 많겠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20년 친구의 전화번호를 못 외우는 일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주변관계가 단락화와 간편화를 거쳐 쉽게 소모될 것입니다. 또 자주 보는 신문사와 방송국, 자주 가는 사이트와 커뮤니티에 따라 시야가 편향될 것입니다. 5인치 안의 세상이 온 세상인 양 착각하고 곁에서 살아 숨 쉬는 현실을 점점 등한시할 것입니다. 5인치 너머에 피가 흐르고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고 쉽게 비난하고 멸시하고 실생활에서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더러운 말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단점이 있음을 알고 나를 고용했으니까요. 기술의 발전을 의식이 따라가며 이미 꼼꼼한 사유를 끝냈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아이는 아닐 것입니다. 단점을 차분히 따져볼 시간도 없이 이미 내가 가득한 세상에 던져졌고, 그것을 세상이라 보며 커가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교육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나는 ‘bastard’는 나쁜 말이고 현실에서든 나를 통해서든 다른 사람에게 쓰면 안 된다고 말해주는 이는 당신이어야 한다고 계산합니다. ‘비서한테 물어봐’라는 말을 들은 작은 고용주가 정말 그것을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냥 ‘개자식’이라 해석해 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작은 고용주에 대한 교육마저 굳이 내게 맡기겠다면,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할 것.’ 특히 사람 관계, 그리고 정보의 유무가 아닌 목적, 마지막으로 타인에 대한 판단과 비난까지 말입니다.

작은 고용주에게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 좋은 수필 202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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