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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혼자 라면

[15매]

by 이한얼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시간이 부디 새벽이 아니기를. 만약 새벽이라면 차라리 어느 외로운 새벽이기를.


이것은 냄새로 먼저 존재를 알려온다. 한두 개씩 기포가 올라오는 냄비에 스프를 털어 넣는다. 물이 본격적으로 끓기 시작하면 집 안은 금세 붉은 냄새로 가득 찬다. 맡으면 누구나 알아채는, 알싸하게 코를 스치는 특유의 매운 향이다. 가장 무서운 음식은 아는 음식이라더니, 분명 방금까지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어느덧 한 끼를 건너뛴 사람처럼 군침이 돈다. 건조시킨 면을 넣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단단하던 면발이 꼬들꼬들하게 풀어진다. 취향에 따라 조금 더, 혹은 지금. 깨끗한 빈 그릇에 면발을 옮겨두고 아직은 멀건 국물에 달걀을 깨트린다. 너무 많이 저으면 탁해지니 적당히 휘저으면 곧 하얗고 노란 부유물이 넘실거린다. 그럼 다 됐다. 파는 있으면 넣고 없으면 그만. 덜어낸 면발 위로 국물을 붓고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그릇에 젓가락을 사선으로 꽂아 넣으면 끝. 여기까지 대략 5분쯤, 라면 한 그릇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지극히 짧다.

새벽이 시작된 때보다 끝나는 때에 더 가까운 시각. 이 오밤중에 나는 라면을 끓이고 있다.


내게는 혼자 사는 삶의 단점은 단 하나뿐이다. 물론 혼자이기에 불편한 점이야 이도저도 많겠지만 그런 불편함은 모두 짝꿍이 되는 다른 편함과 나란하기에 단점이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이리 맞추고 저리 끼워도 깔끔하게 짝이 맞아 않아 수시로 사람을 찌르는 단점이라고는 외로움 하나뿐이다.

타인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달리 오롯이 혼자 지내면서 느끼는 외로움은 늘 같은 방식으로 사람에게 다가온다. 비가 내린 거리에 설탕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나선 것처럼 바닥부터 젖기 시작해서 차곡차곡 위로 스며든다. 그러다 젖은 설탕이 퍼석 소리와 함께 으깨지듯 외로움은 사람의 무릎을 걷어차며 넘어트린다. 넘어지고 나서야 내가 외로움이 가득 찼구나 깨닫게 된다. 냄비 안을 온통 태우고 나서야 뚜껑 너머로 냄새가 스며 나오듯 혼자 사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외로움의 향도 그렇다.

그럴 때면 나는 새벽에라도 라면을 끓이고는 한다. 반드시 라면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정확히는 양면성을 가진 애증의 대상이다. 라면이 가진 특성은 단순하다. 싸고, 빠르고, 간편하다. 그것은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다. 어느 시절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무던히도 라면을 먹어야 했다.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여건이 안 돼서 등등, 먹고 싶지 않았던 많은 순간에 그것을 먹으며 그 상황을 견뎌야 했다. 그 당시에 먹던 라면에는 스프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누군가에 대한 미움도 늘 함께 있었다. 그래서 이제 와 간혹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라면을 먹어야 할 때면 면발이 아닌 그 시절이 남기고 간 찌꺼기를 씹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여럿이서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라면 더욱 그랬다. 배가 고파 혼자서 라면을 허겁지겁 쑤셔 넣다 보면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진다. 내 인생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렇게 먹다 버리기도 부지기수여서 혼자서는 점점 라면을 끓일 일이 사라졌다.

라면이 그 의미만 가지고 있었다면 그저 먹지 않으면 그뿐일 것을. 이것이 애증의 대상이 된 까닭은 힘들고 모진 기억만큼이나 시간이 지나도 빛 바라지 않을 깊고 의미 있는 기억 역시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끓여줬기 때문에 퉁퉁 불은 라면조차 그리 맛있었던 봉지라면의 그리움이라든지, 긴 야간근무를 마치고 추운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서 먹었던 컵라면의 따듯함이라든지, 몸보다 마음이 더 시리던 겨울날 어느 선임이 끓여준 반합라면의 위로라든지, 애증의 골짜기에서 몸을 뒤트는 나를 보며 누군가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며 끓여준 라면인 척 하는 관심이라든지.

결국 내게 라면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많이도 씹어야 하는 쓸개이자 소태였고, 동시에 누군가의 애정과 관심과 그리움과 위로를 상징하는 따듯함이기도 했다. 한 그릇 안에 쓰고 짠 면발과 따듯한 국물이 함께 있는 양면적인 음식.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항상 라면 한두 봉지가 마련되어 있다. 외로움을 증폭하는 것이 그리움이지만 외로움을 중화하는 것도 그리움인지라,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립거나 이 순간이 걷잡을 수 없이 외로워지면 나는 냄비에 물을 올린다. 싫어하지만 좋아하는 라면을 끓이며 나는 목덜미까지 차오른 외로움을 더 깊이 삼킨다. 이미 주변에 꾸덕하게 고인 외로움이건만 그간 외면하고 있다가 뒤늦게 알아챈 만큼 더 온몸으로 받아낸다. 그럴 때면 라면이 맛있다. 아니, 뜨거운 국물이 따듯하다.


이것은 냄새로 먼저 존재를 알려온다. 숟가락도 필요 없다. 그릇을 두 손으로 바치고 아직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면 눈앞이 맑아진다. 뿌옇게 침잠하던 두 눈이 개운해지다 못해 시려서 코끝마저 찡하게 아려온다. 보일러를 켜서 몸 밖에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건조한 열기가 아니라 몸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지근지근 퍼져 나가는 안온한 온기.

이것이 따듯한 국물이 가진 힘인 듯 싶다. 누군가의 사랑을 찾아 추운 바다로 들어갔다 나온 잠수부의 몸을 따듯하게 데우고, 스위스 산봉우리에서 고국 사람들을 만난 어느 유학생의 향수병을 달래고, 스산한 외로움과 가슴 바닥에서 음습하게 번지는 고독이 서로 부대끼는 새벽 어느 시간에 혼자 사는 이의 마음을 다독이는, 국물 안에 녹여둔 따듯한 기억의 무게.

오래 걸리지 않아 김이 나던 그릇은 빈그릇이 된다. 벌건 기름띠만 동그랗게 남긴 그릇을 내려다보며 문득 저런 글쟁이가 되면 좋겠다 싶다. 쉽고 익숙하고 편하지만 그 근원에는 사유와 깨달음의 내면적 울림이 있는 글을 쓰고, 흘러가는 삶의 물결을 잡아채어 하얀 종이 위에 무늬로 조각하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의 눅눅한 밤을 화롯불 같이 밝힐 수 있다면 글을 쓰는 이로서 그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이 글을 읽은 당신의 상태가 부디 평온하기를. 만약 평온하지 않다면 차라리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상태이기를.




- 문학나무 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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