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오징어 게임 3 (스포일러 있음)
오징어 게임 3를 만든 이유
'오징어 게임 3'를 보고 이전과 달리 글을 딱히 써야 할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이 작품에 대하여 글을 쓰긴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 2'에 대하여 이미 글을 쓴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오징어 게임 3'는 그런 맥락입니다. '오징어 게임'을 만들었고 '오징어 게임 2'를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징어 게임 3'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지금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같은 것이랄까요?
작가의 고뇌
그런 면에서 '오징어 게임 3'는 이 게임의 작가이자 감독인 황동혁 감독의 작가로서의 고뇌를 느끼게 합니다. 마치 3부작의 소설 중 1편이 뜻밖의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속편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철저한 작가적 고뇌입니다. 물론 아직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에 미리 후속작을 걱정할 일도, 1도 없긴 하지만, 하물며 브런치 연재북 망작의 다음 브런치북을 쓸 때도 이름 없는 무명의 작가라도 약간의 고민은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엄청난 작품의 후속작을 후딱 써 내려가기란 전지적 작가적 관점에서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기는 과연 빛이었을까?
그런 황작가의 어두운 마음속에 빛으로 다가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기'입니다. 감독 스스로 밝히기를 아기에 대한 구상이 떠오르며 시나리오의 막막한 어둠 속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것처럼 표현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빛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두운 먹구름의 징조였던 것이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아기'의 등장이 이 게임을 엉망진창으로 몰아넣는 어두운 먹구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이 글은 죄 없는 순수한 결정체의 산물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인, 빌런도 건들지 않는 절대 지존 '아기'를 논란의 중심으로 끌어 드리며 비난을 받을 일을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 정신 나간 작가가 누굽니꽈?) 그런 '아기'라도 이왕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이상 한번 그 자격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일이지요.
작가는 이 게임에서 아기를 등장시킴으로써 아기를 살리기 위한 희생을 통해 인간다움의 선택이란 무엇이 다른지 심오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악당의 정해진 룰을 파괴하고 예정된 결과를 비틀어 꺾을 어마무시한 필살기였을 것이지요. 과연 그랬을까요?
아이로 인한 룰의 붕괴
그러나 안타깝지만 스토리의 논란으로 볼 때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이의 등장은 이 철저한 오징어 게임이라는 탄탄한 시스템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그것이 악당의 세계뿐만 아니라 시청자의 세계까지 무너뜨렸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오징어 게임은 매우 잔인하게 의도되었지만 철저하게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존중하는 척 함으로써나마 일관되고 공정하게 보이는 듯한 절대적 게임의 룰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매우 살벌하지만 단순하게 죽고 죽여도 되는 규칙 속에 단 한 명의 생존자에게 456억 원이란 상금을 반드시 전달하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지요.
그런데 임산부를 이 게임에 참여시킨 것부터가 이 주체 측의 부실한 인사 검증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냅니다. 그것도 게임 중 출산이 염려되는 임산부를 말입니다. 더군다나 태어난 아기를 따로 돌보지 않고 정식 참가자가 아닌데도 참여자가 되는 주먹구구식 운영 과정은 오징어 게임의 룰의 공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힙니다. 그동안 투표를 통하여 계속 참여 여부를 결정했던 공정하다고 자부했던 주장마저 아기의 의사결정은 기권으로 처리함으로써 심지어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게임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게 되지요.
아이를 애초에 떠올리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아이는 물론 순수하고 미래를 위하여 살아남아야 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노 키드 존에 규칙을 어기고 난입한 아기를 방치하거나, 흡연실에 아기를 풀어놓은 것처럼 이 게임은 한참 엇나가 오직 '아기'를 중심으로 심각하게 왜곡되고 어른들의 난감한 희생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것은 극 중 목숨으로의 희생뿐만 아니라 영화에서의 개별 캐릭터로서의 존재감 상실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하였지요. 그 누구도 이름 없는 이 아이의 막강한 '청약 가점'과 아이 전용 '저리 대출' 앞에 로또 아파트 줍줍에 공정히 경쟁할 수 없고, 그냥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아쉬운 점은 작가가 이 '아이'에 대하여 애초에 떠올리지 아니하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더욱더 개별 참가자들의 캐릭터도 살리고 서사도 탄탄하게 끌어가지 않았을까?라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차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인류의 미래이자 수많은 희생의 결과인 이 '아이'를 감히 걸고 넘어가는 막장을 실현해 보는 것입니다. 어차피 아이가 등장할 때 이 게임은 돈의 순수함을 넘어 막장으로 변질되고 있었으니까요.
아이의 미래
그래서 결국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생사도 모른 체, 아이를 살게 한 수많은 희생의 영문도 모른 체 456억 원의 후원으로 신나게 살아가게 될까요? 그러하길 기대하겠지만, 안타깝지만 오징어 게임의 운영자라면 이 아이를 아주 잘 키워 오징어 게임의 차세대 운영자나, 또다시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로 초청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아이가 다시 빌런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 게임의 생리이자 아이를 살린 희생의 숭고함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너무 빌런 같은 생각이라고요? 제가 작가라면 그렇게 후편을 써 내려갈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이를 살리는 일은 결국 최악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이는 등장하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지요. 아이는 그 어떤 것을 위한 도구화되었을 때, 아이가 미래, 숭고함, 희생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할지라도 이미 그 순수함을 이미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공제, 가점이나 대출의 도구가 아닐 때 가장 순수한 '아이'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희생 또는 목적을 통해 아이에게 456억 원을 줍줍 하게 시키는 생각은 애당초 아이에게나 게임에나 빛이 아니라 어두운 먹구름이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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