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의 편리성과 유용성은 다른 가전들을 압도합니다. 개울가에 가서 빨래 방망이를 가지고 빨래를 했을 시절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아찔한가요? 말도 안 되는 옛날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어릴 적에는 빨래판과 빨래 방망이 그리고 빨래 비누가 3종 세트처럼 존재했습니다. 무슨 원시인이었냐고요? 맞습니다. 한때는 구석기인이었는데 타임머신을 타지 않고도 반도체기인으로 진화하여어 세탁기를 돌리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직접 빨래를 할 경험은 많지 않아서 세탁기가 없는 시절이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 보니 정말 세탁기가 없더라고요. 그때에는 짤순이라고 불리는 탈수기만 있었습니다. 왜 짤돌이가 아니었을까요? 여하튼 세탁기가 없으니 실제로 빨래를 하려고 드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임상사가 새로운 세탁기를 구입하면서 세탁기와 탈수기가 붙은 구형 모델의 세탁기를 운 좋게 불하(득템)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느낀 세탁기의 편리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다른 내부반에서는 아직 구석기에 머물러 손빨래를 하는데 갑자기 철기문명을 받아들인 느낌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정말 빨래 걱정 안 하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임을 경험한 순간이었지요.
실제로 빨래를 하려면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이 소요됩니다. 빨래판 혹은 빨래 방망이로 때를 빼는 것도 일이지만 추운 겨울날 찬물에 빨래를 한번 해보면 이것은 차디찬 물과도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이 따로 없지요. 게다가 빨래를 짜는 것은 얼마나 힘든지 엄청난 악력이 필요할 뿐 아니라 손목과 팔꿈치가 뒤틀리도록 힘든 중노동입니다. 이불빨래를 다라이에 넣고 발로 밟으며 같이 하는 남녀의 모습은 항상 낭만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 해 본 사람이라면 큰 이불을 빨고 헹구는 것은 결코 낭만보다는 빨래를 같이 짜다 마음이 안 맞아 헤어지기가 싶상인 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탁기는 인류에 깨끗한 옷을 큰 힘 들이지 않고 입을 수 있게 해 준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특히 털을 버리고 옷을 입도록 진화한 동물은 인간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부 개와 고양이, 나무도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날 옷을 입기도 하지만, 인류의 진화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세탁기가 발명되어 빨래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진정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흔히 세탁기 하면 드럼 세탁기와 통돌이 세탁기가 생각납니다. 세탁기를 사기 위해서는 이 둘 중에 항상 고민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드럼 세탁기는 단지 문이 옆으로 달린 세탁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탁 방식이 다르더라고요. 통돌이는 물살을 발생시켜 마찰에 의하여 세탁하는 방식인 반면 드럼은 빨래가 떨어지는 낙차에 의해 세탁하는 방식으로 원리가 다릅니다. 통돌이는 물을 더 많이 먹고 드럼은 전기를 더 많이 먹는다는 차이도 있지요. 한편으로 드럼세탁기는 물이 옆으로 쏟아져 내릴 걱정을 항상 동반합니다. 그렇지만 세탁 중간에 빨래를 추가할 수 없을 뿐 신기하게도 물이 쏟아져 내리지는 않습니다.
세탁기는 가전계의 동물 중 아직도 큰 울음소리를 자랑하는 동물입니다. 특히 세탁기가 돌 때 지축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는 세탁기의 위엄을 나타내지요. 그래서 윗집에서 빨래를 하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빨래를 삼키고 소화시킨 후 배출하는 물소리는 얼마나 또 우렁찬지 밤새 아랫집을 공포에 휩싸이게도 만듭니다.
세탁기는 진화는 요즈음은 구경하기 힘든 탈수기와 통합되더니 '건조기'라는 진화 동물로 분화하였지요. 그래서 지금의 세탁기와 건조기는 겉모습으로 보기에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형태가 많습니다. 그래도 세탁기의 지위를 건조기가 넘보기에는 힘들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건조에는 천연 건조, 즉 햇볕에 말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불빨래를 하는 것이 항상 낭만적이지만은 않는데 비하여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빨래가 널어져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풍경은 특히 외국에서 보면 무척 낭만적이기기도 하고 다 같은 사람 사는 동네 같은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세탁기
이렇게 세탁기의 중요성에 비하면 세탁기는 아직도 집안의 중앙보다는 다용도실이나 베란다 같은 구석진 공간을 차지할 뿐입니다. 이는 마치 하마처럼 늪지의 숨은 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둔중한 몸집에 비하여 물속에서 엄청 빠르고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하마 같은 세탁기입니다.
세탁기는 아무리 예쁘게 만들어 보았자 그리 세련돼 보이진 않는 듯합니다. 특히 세탁기 위에 건조기가 올라간 타워 형태의 모습은 왜 저 쌍둥이 동물이 굳이 무등 놀이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항상 갖게 하지요. 그리고 집안에서는 키우기 너무 큰 동물처럼 요즘에는 세탁을 아예 코인 세탁실에서 이용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지요.
세탁기는 정말 그 세탁의 기능에만 충실히 진화해 왔지요. 탈수나 건조 같은 부가 기능을 빼고는 거기에 뭘 더하거나 다른 가전과 합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듯합니다. 자석이 붙는데도 냉장고와 달리 메모판으로 쓰이지 못한 이유입니다. 미래의 세탁기는 좀 더 슬림하고 세탁, 건조가 일체형으로 나와서 깊은 늪을 벋어나 집안의 중심부로 진출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다용도실이나 베란다의 한켠에서 자유롭게 집안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물 내려가는 소리를 여전히 즐기고 있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