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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가전 설명서 : TV는 사자

by Emile

TV가 있는 곳이 뉴욕! TV가 놓이는 곳은 보통 집안의 중심지입니다. TV를 다 설치하고 나면 마치 뉴욕의 타임스퀘어처럼 형형의 광고가 TV를 통해 번쩍이니 이쯤이면 TV를 뉴욕이라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이사를 해도 'TV를 어디에 놓을까? 벽에 걸까?' 가장 먼저 생각하고 집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중심지에 TV가 놓입니다. 그런데 TV는 가전계의 사자와 같은 왕좌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어느 날 TV를 거실이 아니라 한쪽 방으로 옮기자는 주장이 나오며 TV의 왕좌는 심각하게 위협받게 됩니다.


TV는 사자와 같이 ‘무리’의 개념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TV 앞에 둘러앉아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는 풍습이 연상되곤 했지요. 그러다 보면 리모컨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싸울 일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각 방에 TV가 있으면 해결될 문제였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지요. 결과는 어느 순간 집에 TV가 여러 대 존재하게 되었고 당연히 싸울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각자 먹고 싶은 저녁을 취향에 따라 각자 먹는 것도 같았지만 온 가족이 빙 둘러 모여 식사를 하는 사자와 같은 무리 생활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TV는 다른 가전이 다 비슷하거나 더 작은 크기로 진화할 때 오히려 몸집이 더 크게 불리며 진화한 동물입니다. 한 선배는 신혼집 거실보다 더 큰 TV를 와이프가 사 와서 TV가 거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을 정도지요. 물론 크기뿐만 아니라 브라운관에서 평면으로 LCD로 LED로 OLED로 화질도 진화하긴 했지만 TV는 여전히 크기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한때 너무 크게 느껴졌던 32인치 TV는 이제 가장 작은 TV 축에 속하게 되었지만 저는 아직 이 크기의 TV를 여전히 보고 있긴 합니다. 몰입감이 있거든요.


한편 TV는 치명적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외부로부터 프로그램이 전송되어야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TV 설명서는 읽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대신 인터넷이나 케이블 업체에 따로 불러야 비로소 TV를 볼 수 있는 바보상자지요. 그러므로 TV는 가전계의 사자왕 리처드가 아니라 용기를 잃은 "오즈의 마법사" 깡통 로봇의 친구 사자 일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TV가 바보상자라고 불릴 때가 TV의 최 전성기였습니다. 무엇에 홀린 듯이 하루 종일 TV만 보고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 '바보상자'였는데 지금은 그 지위를 스마트폰에 내어주었으니까요. 심지어는 걷거나 사람을 만나면서도 그 바보상자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자왕 TV는 작은 쥐에게 굴욕을 당하는 시대인 것이지요.


그래도 한때는 TV는 인간의 친구를 자처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은 항상 TV를 틀어 놓지요. 마치 인간이 함께 있는 것 같은 친근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TV는 항상 착한 친구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외로움을 파고들어 세뇌에 이용하는 나쁜 친구에 가깝지요. “조지 오웰의 1984”에 보면 TV와 같은 "텔레스크린"이란 것이 나오는데 항상 집안의 중심에 위치하게 하고 이를 통해 체제를 세뇌하고 또 감시하는 TV의 역할이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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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은 1925년 영국의 기술자인 존 베어드((John L. Baird)에 의해 발명되고 1929년에는 BBC가 세계 최조로 텔레비전 방송에 대한 실험을 실시하였으나 TV가 정기적인 방송을 시작한 것은 정작 독일에서였습니다. 이윽고 곧 히틀러가 TV가 등장했고 "권력을 장악하려 하면 방송국을 장악하라"라고 했던 것처럼 TV는 곧 좋은 친구인척 우리에게 접근하며 정보를 넘겼지요.


타임머신을 타고 올 경우 TV는 가장 혼돈스러운 상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상자 안에서 사람이 등장해서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한때는 TV로부터 귀신이 나오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지만 눈치 른 귀신 또한 스마트폰으로 재빨리 갈아타게 됩니다. 동물들도 처음에는 TV에 등장하는 다른 동물이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하지만 개와 고양이가 TV를 태연히 보고 있는 세상입니다.


TV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TV는 이제 집안의 중심을 차지하는 뉴욕의 타임스퀘어가 되기는 더 이상 어려울 듯도 합니다. 거실의 권력 중심부 밀려나 골방에 놓일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작아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강자와 더불어 TV의 왕좌를 위협하는 모니터, 태블릿이 무리 지어 덤벼들었기 때문입니다. TV라는 사자가 하이에나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거나 멸종의 위협까지 몰리게 된 상황이네요.


TV는 보지 않고 있을 때는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검은 사각형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TV가 거실에서 사라지는 날 어쩌면 정글은 더 큰 평화를 마주할지도 모르겠네요. TV란 사자가 빠진 정글에는 훨씬 더 많은 동물들이 뛰놀고 다른 할 일들과 시간이 생깁니다. 다만 그 자리를 하이에나 같은 스마트폰이 차지하지 않는다면요.

그래도 가끔은 큰 화면의 사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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