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 논란이 되었듯이 냉장고는 정말 가전계의 코끼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덩치가 코끼리만 하고 키는 사람보다 크며 무게는 1톤을 훌쩍 넘어서 가전제품 중 인간 혼자 사냥하기(옮기기) 힘든 동물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부피 자체가 거대한 만큼 냉장고의 배치는 중요합니다. 집을 보러 갈 경우 흔히 냉장고 놓을 자리부터 살피는 것은 웬만한 공간으로는 냉장고를 놓을 자리가 부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큰 덩치는 다른 가구나 벽에서부터 불룩 튀어나와 숨길 수 없게 되는 경우를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주변의 옷차림과 딱 맞는 슬림핏의 냉장고가 등장했다고는하나 마냥 패션만 고수할 경우 곧 냉장고의 내부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사를 해 보면 알게 되지만 가전제품 중 의외로 가장 우선순위로 필요한 것은 냉장고입니다. 다른 가전들이야 한동안 사용하지 않고 버텨 볼 수도 있지만 인간 에너지원의 근본이 되는 냉장고는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당장 구매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는 집안에 전기가 나갔을 때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다른 가전제품의 경우 일단 불편하긴 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경우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반면 냉장고는 전원이 끊기는 순간 그 속에 든 음식들이 녹아내리거나 상할 위험에 곧바로 직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안에서 난데없이 소음이 난다면 십중팔구 냉장고의 울음소리일 확률이 높습니다. 냉장고 속 냉매는 압축되면서 몇 분 혹은 몇 십분 주기로 드드드득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는데 밤새 더 울부짖는 것으로 보아 야행성임이 분명하지요. 냉장고가 크다고 더 큰 소리를 내거나 작다고 더 작게 우는 것은 아닙니다. 작고 스타일리시한 패션 냉장고의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습니다. 어릴 적 아무도 집에 없이 혼자 있는데 집에 귀신 소리가 나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냉동실의 성에 제거를 하며 냉장고에서 나는 소리였었지요.
패션 냉장고
여름에도 얼음을 갖고 음식을 오래도록 시원하게 보관하고 싶은 냉장고에 대한 인간 욕망의 역사는 기원전 2500년 전 전국시대 “예기”에 기록될 정도로 유래가 깊습니다. 벌빙지가(伐氷之家)라는 말이 있는데 얼음을 캐다가 쟁여 놓은 가문이란 뜻으로 세력 있는 가문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지요. 냉장고는 석빙고와 같이 얼음을 가둬 두는 방식의 냉장창고를 이용하는 방법이 오랫동안 전해 왔는데 오늘날과 같이 냉매를 사용해 저장고 안의 열을 내리고 열기를 배출하는 방식의 냉장고가 등장한 것은 불과 100여 년 남짓한 일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헤리슨이 1862년 국제 박람회에 냉장고를 처음 전시하였고 오늘날과 같은 가정용 냉장고가 나온 것은 19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였지요.
냉장고는 아주 잠깐 일하고 쉬기를 반복하는 임원급 가전과 달리 24시간 365일 쉬는 날 없이 일하는 가전계의 성실한 노동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쉼 없이 일하는 냉장고 문을 잠시라도 오래 열고 서 있거나 냉장고 안에 ‘뭐 새로운 먹을 것이 있나?’ 굼뜨게 바라보고 있으면 냉장고를 홀대한 이유로 엄마로부터 등 짝 스매싱을 당하기 쉽지요.
냉장고 문을 자주 열고 닫을 경우 냉기가 빠져나가고 이를 다시 채우기 위해 전기 사용량이 늘어나긴 하지만 냉장고는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일을 시키는 데도 연봉이 크지 않은 고효율 저임금의 친절한 가전제품입니다. 요즘은 그런 냉장고 문을 빨리 닫지 않고 일을 방해할 경우 냉장고가 알아서 무슨 큰 범죄라도 저지른 듯 연신 경보음을 울려댑니다.
냉장고는 자석을 붙일 수 있는 흔치 않은 가전제품입니다. 그래서 냉장고의 넓은 판은 자석을 붙인 보드판으로 쓰여 모든 집안의 메모의 메카가가 되지요. 더군다나 냉장고의 문에는 자석이 들어가 있어 문이 그렇게 꽉 밀폐되어 닫히는 것을 아는지요? 그러므로 냉장고와 자석은 이미 연관이 꽤 깊은 사이입니다. 냉장고 체중을 줄이기 위해 냉장고 문에 더 이상 철판을 사용하지 않고 자석이 더 이상 붙지 않게 된다면 냉장고에 뭔가 섭섭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냉장고 덩치가 큰 만큼 포장되어 오는 박스도 초대형을 자랑합니다. 어릴 적 바로 그 점이 눈에 들어왔는데 냉장고 박스를 사용해 초대형 딱지를 접은 적이 있지요. 그 딱지는 절대로 뒤집힐 일이 없어서 실제 딱지치기에 사용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그 크기만큼이나 자부심이 솟구쳤던 추억이 있습니다.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지니 시원한 것은 더욱 각광을 받을 것으로 보아 냉장고의 미래는 밝아 보입니다. 북극지역에 냉장고를 파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처럼 이야기되었지만 천연 냉장고인 북극에서도 냉장고가 필요한 날이 머지않았으니까요.
“냉장고 파먹기”란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음식을 사거나 배달시켜 먹지 않고 냉장고에 보관된 음식으로 한동안 생활하는 방식인데 COVID19 시기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오면서 냉장고의 파먹기는 더욱 늘어날 것이고 냉장고의 필요성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냉장고는 크게 진화를 보이기보다는 분화를 거듭한 동물입니다. 요즈음은 단문형 냉장고보다 양문형 냉장고가 인기가 많지만 문을 위아래에서 양 옆에 달고 공간을 두 개에서 네 개로 분리했을 뿐 기능적 진화에는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드 합니다. 그에 비해 김치냉장고나, 와인냉장고, 화장품냉장고, 심지어 영안실으로의 냉장고의 분화는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냉장고에 머리를 넣고 열기를 식히는 모습이 웃음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지만 냉장고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실현한 것이 바로 에어컨이라는 것을 아는지요? 냉장고와 에어컨의 원리는 의외로 같습니다. 방을 냉장고로 만들기 위해 열기를 실외기를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빼는 것이 에어컨 일 뿐이지요. 살아있는사람을 위한 냉장고입니다.
그러나 냉장고의 분화에 비해 다른 가전과의 통합은 요원해 보입니다. 냉장고에 한때 정수기와 디스플레이를 달고 이종교배를 시도하긴 했지만 냉장고의 문은 물이 나오거나 디스플레이로 쓰이기보다는 여전히 자석 보드판으로 쓰이는 것이 더 나아 보이니까요.
냉장고의 사용법은 설명서를 읽지 않아도 될 만큼 간단합니다. 옮기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공간이 확보되고 자리만 잡아 전기 코드를 꽂기만 하면 되지요. 단지 온도 조절에 잠시 설명서를 참고로 할 뿐입니다.
갑자기 지구의 환경이 바뀌어 빙하기가 오지 않는 한 냉장고는 온난화 시대를 맞아 멸종을 걱정하기는커녕 더욱더 집안의 절대 강자 가전으로서의 위상을 차지할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덩치 큰 코끼리를 향한 인류의 구애는 멈출 수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