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가전제품을 사면 설명서가 딸려 나옵니다. 성격이 급한 사용자라면 설명서는 던져두고 일단 스위치를 켜는 것으로 몸으로 사용 방법을 익힐 것이고 그 보다 더 신중한 사용자라면 깨알 같은 글씨지만 꼼꼼히 읽어본 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시험해 볼 것이겠지요.
저는 후자에 속하는 편입니다.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 설명서를 일단 펼쳐 들고 공부에 가까운 정독을 할 뿐만 아니라 설명서 파일에 철을 해 놓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파일은 어느덧 집안의 각종 가전제품 설명서로 꽉 차게 되고 이제는 제법 두꺼워져 마치 진짜 책 같은 형태를 띄게되지요.
그러나 가전제품 설명서는 책 중에도 전혀 재미있는 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는 가전제품 설명서 따위는 더욱 읽기 싫어서 몸소 시행착오를 통해 사용 방법을 익히게 되지요. 처음에는 꼼꼼히 설명서를 살피는 경우라도 처음에만 빠르게 감정 없이 훑어 읽을 뿐 그 이후로는 절대로 다시 펼치지 않는 책으로 남게 됩니다.
다만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그 파일 책을 다시 펼쳐 드는 경우가 생깁니다. 바로 가전제품이 고장 또는 작동하지 않는 위기에 처한 때이지요. 일단 스위치부터 켜는 사용자라 해도 가전제품에 불이 들어오지 않거나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을 때 드디어 이 책을 다시 꺼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자세히 읽어보면 한때 공대 오빠였을 경우에는 물론이고 인문학적으로도 경영학적으로도 상당히 난해한 전문 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시험을 치른다면 자신 없어질 수밖에요.
이 설명서가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아무래도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않아서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전제품 설명서는 ‘좀 재미있으면 안 되나?’라는 의문에 이르렀습니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의 종류는 이미 상당히 많을 뿐 아니라 종류도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불어 가전제품 설명서를 모아둔 책도 한 권으로는 모자라고 2편에 이어 3편도 나올 지경입니다. 그런 책이 각 집집마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히 베스트셀러인 동시에 스테디셀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현대인의 적응이란 곧 가전제품에 대한 적응이라 할 수 있지요. 만약 과거 어느 시점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오거나 현재에서 미래로 간다면 그것은 새로운 가전제품에 혼란을 겪거나 새로 적응해야 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가전제품 설명서 책이 늘어나는 시기는 특히 결혼을 하거나 이사를 하는 등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입니다. 이사의 본질은 가전제품을 안전하게 옮기고 재배치하여 다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결혼의 본질은 새로운 가전제품과 함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신혼의 기간이 짧고 달콤하듯이 새 가전제품의 기쁨도 처음 몇 주가 가장 기쁜 것 아닌가요?
이번 기회에 가전제품에 대한 생각을 써 볼까 합니다. 고장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니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설명서를 좀 더 재미있게 한번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존의 딱딱하고 전공 서적 같은 모든 가전제품 설명서들이 감성 가전 설명서로 대체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설명서 책보다는 재미는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