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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가전 설명서 : 고래 비데

by Emile

바다 밑에 숨어 있는 듯하다가 이따금 바다 위로 나와 힘찬 물줄기를 뿜고 있는 비데 위에 앉아 있노라면 마치 고래 등 뒤에 타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시트 커버를 닿은 변기의 모양은 고래의 앞모습을 닮았지요. 물속 깊이 가라앉았다가도 힘찬 물줄기를 뿜으면 수면 위로 당장 떠 오를 것 같은 하얀 고래 말입니다.


요즈음은 비데가 없는 곳에 가면 때론 불편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첨단 가전제품을 타고 앉아 있는 것이 이렇게 익숙하게 될 줄은 고래 등에 타는 것만큼이나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매끄러운 양변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주에서 손꼽히는 문명을 지구에 이룩한 셈인데, 만약 외계인이 지구를 탐색한다면 이 비데야 말로 지구인의 높은 문명 수준을 대변하는 가장 첨단의 가전제품이라 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데는 사용하기 전 까지는 필요성에 대하여 잘 느끼지 못하는데 막상 사용하고 나면 끊기도 힘든 마약 같은 가전입니다. 한때 비데가 잘 없던 시절 화장실에 비데가 있는 회사는 비데 하나만 봐도 열을 안다고 복지가 엄청 좋은 회사였음이 분명하였지요. 그 좋은 비데를 치사하게 사장님 전용 화장실에만 설치하기도 했었고 좀 더 잘 나가는 위층의 계열사의 화장실에만 비데가 설치되어 있어서 일부러 위층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이 요상한 물체는 사용하다가 어느 날 사용치 못하게 되면 영 찝찝하다니까요.


비데는 다른 가전과는 차별화된 전문직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가전이 넘보지 못할 독특한 영역을 구축해 왔고 다른 가전과 콜라보를 생각지도 않지요. 화장실이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고 철저히 지배하되 고래가 바다에 사는 독특한 포유동물인 것처럼 이 비데도 물이 가득한 욕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을 쏘아 데는 특이한 가전동물이지요.


비데는 생각보다 최첨단 가전제품입니다. 단순히 물총처럼 물만 쏘아데은 것이 아니라 정밀한 포신이 움직이며 정확한 지점에 물을 분사합니다. 게다가 인체 감지 센서가 있어서 시트 커버도 자동으로 여닫고 물도 자동으로 내려주기도 하지요. 시트에는 온열 기능까지 있어서 추운 겨울날이면 뜨끈해진 비데에서 일어나기를 주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비데의 기능은 뭐니 뭐니 해도 정확한 조준과 명중 능력에 있습니다. 최첨단 현무 나이키 미사일이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서 타격하고 K-9 155mm 자주포가 정확히 포신의 각도를 맞춰 포를 발사하는 군사 기능이 비데에도 장착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따뜻한 물이 나오는 기능도 있어 감정까지 무력화시키지요.


비데의 첫 느낌은 충격과 황홀 그 자체였던 기억이 납니다. 무언가가 대놓고 엉덩이와 주요 부위를 마사지해 주겠다는 기능은 너무 노골적으로 에로틱했으며 이 가전의 기능에 대하여 이상한 상상과 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었지요.


'비데'라는 말은 원래 비데에 올라탄 모습이 조랑말에 올라탄 모습과 유사하다 하여 조랑말을 뜻하는 단어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수동식 비데가 등장한 것은 1908년의 일로 물주머니를 손으로 압착하여 수압을 통해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다 수도관을 연결하고 변기 옆에 나란히 놓는 형태가 되면서 대중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해외에서 유럽계 호텔에 가면 변기와 나란히 놓인 알 수 없는 세면대 같이 물이 나오는 요상한 물건이 있어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인고?'하고 당황한 때가 생각나는데 그것이 바로 비데입니다. 동남아에서는 핸드 비데, 비데 샤워로 불리는 샤워기 같은 것이 변기 옆에 달려 있어 역시 당황해했었는데 그것도 역시 비데였지요.

서양식 비데

초기의 비데는 남녀관계의 위생을 위하여 또는 피임을 위하여 사용하는 목적이 강해서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수시로 부정적 표적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쾌락과 섹슈얼 주의의 산물이라 비난받기도 했지요. 또한 비데는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의 영역에 속해서 TV나 냉장고 같은 고가의 가전 등장 훨씬 이전부터 부를 과시하는 제품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는 대중들에게 좋지 않게 비쳤지요.


이러한 이유들로 비데의 진화는 등장 이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외계에서 온 듯한 가전은 환영받지 못했고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는 듯 보였습니다. 이러한 비데가 비로소 성공을 보이며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결국 1980년대에 이르러 전자식 비데가 등장한 이후입니다. 기존 변기에 올리기만 하는 간단한 설치와 편의 기능들을 비로소 가전제품에 익숙한 현대인이 수용할 수 있게 진화한 것이지요.


이처럼 비데는 가장 진화한 동물일뿐더러 아직도 외계에서 온 생명체처럼 미스터리 한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할 것이란 편견과 달리 아주 세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스위치만 켜면 되는 다른 가전제품과 달리 설명서도 꽤나 복잡한 편에 속합니다. 그래야 비데가 작동되지 않아 변기 위에서 꼼짝달삭 못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가 있지요.


이 첨단 기기는 설명서를 꼼꼼히 읽고 시험 운행까지 맞추어야 비로소 자주포나 미사일처럼 운용을 하고 기능을 100% 발휘하여 적들을 섬멸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포탄이 엉뚱한데 날아가거나 물이 사방에 뿌려지고 심지어 목표한 곳이 아닌 물 대포를 얼굴에 맞을 수도 있는 치명적 살상 무기입니다. 그냥 물인데도 목표한 지점이 아닌 곳에 맞을 경우 엄청 찝찝하지요.


비데라는 최첨단 외계 생물은 더욱더 미래에 진화가 기대되는 동물입니다. 이미 비데는 무선 리모컨을 장착하고 비데에 앉아서도 문을 열 수 있는 네트워크를 생성하고 있습니다. 비데에서 음악이 나오거나 책을 읽어 주어도 좋을 듯한데요.


문제는 비데에 온열 기능이 있어 비데 위를 떠나기 싫게 되듯이 비데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이 건강에 그리 바람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데의 기능은 잠깐의 쾌락으로 만족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조랑말은 오래 타는 말이 아니라 잠시만 타 보는 것이고, 하얀 고래는 물을 한번 힘차게 내뿜고는 다시 바닷속으로 돌아가야 하지요. 비데도 그렇습니다.


ps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보면 신박한 생각이 떠오르며 고래가 뛰어 오르지요. '비데'위에 앉아 있어도 종종 신박한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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