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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묘비명

by Emile

어떤 책은 거북이 보다 더 오래오래

몇백 년을 살기도 하는데

어떤 책은 알에서 깨기가 무섭게

잡아 먹힌다네

아직 바다 한번 못 보고

물질 한번 못하고

스르르 짠물에

녹아 버린다네


스테디셀러로

오래오래 사는 것이 좋을까?

베스트셀러로

진열대의 꼭대기에 서보는 게 좋을까?

책들에게 물어봐야지

책은 여느 사람과 같진 않을 테니까


책으로 태어났으면

그래도 반짝이는 리본 하나는 달아야지

그래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오래 살아남는 책이 진정한 책이지

책도 생각이 다르다네

그 안에 쓰인 글만큼 말이지


어떤 책은 아직 신간이라

진열대의 맨 앞에 놓이지만

아무리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였다 해도

오래된 책은 중고로도 사주지도 않는다네

그 안에 어떤 위대한 글이 쓰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표지의 광채와 책장의 빳빳함으로만 평가받지


어떤 글은 그렇게 어렵게 책이 되었지만

어두운 구석에서 오래된 잉크처럼 바래가겠지

그러다 누군가 그 책 꺼내어 읽어 들어

석방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책장의 한켠에 모범수로 수감되어 있겠지


그런데 기대했던 책장에서 마침내 석방되는 날

이제 낡고 오래돼서 버리기 위해서라네

중고로도 헌책방에서도 받아주지 않아서

마침내 사형을 언도받았다네


그래도 책으로 태어났으니

글의 사명을 다한 것이겠지

아무리 많이 읽혔건

아무리 적게 읽혔건

글은 책으로 태어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으니

그 할 일을 다하고 기꺼이 순국한 거라네


책 누렇게 뜨고 책 모퉁이 닳으면

아무리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였다 하여도

아우라 넘치던 글이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네


그래도 한 때는 최고의 책이었다고

설사 그렇지 못한 책이었다 해도

책을 쓴 이의 마음에는

한 때 네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이었고 글이었다고

그 감정을 한자 한자 꾹꾹 눌러쓴

너는 나의 책 중의 책, 글 중의 글

첫사랑의 고백이었다고

묘비처럼 기억되겠지

이제 그 책 흔적이 온데간데 사라지더라도

마음의 돌판에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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