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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Nov 10. 2021

미래를 사는 방법에 대하여

컨버전스 2030 미래의 부와 기회

$ 과거에서  미래로


"과거"

'과거'가 중심이 되던 때가 있었지요. 우리는 오랫동안 '과거'를 거울 삼아 살아왔습니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아는 것이 중요했지요. 인류의 발전은 이 '과거' 업적의 집합체였으니까요. 과거를 차곡차곡 기록하고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현재'도, '미래'는 더더군다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과거'의 것들을 잘 익혀야 했고, 그 대신 '현재'는 잃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하는 무엇이었지요. 미래는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갑작스레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그러다가 과거에 너무 앞만 보고 달렸으니, '현재'를 살라하였지요. '욜로'(Yolo ; You only live once)가 대표적 슬로건이었습니다. 발음이 어쩌다 보니 얄미울 수도 있겠네요. 특히 과거를 지켜온 어르신들에게는 그랬었지요.

'현재'의 행복이 중요하니 과거는 그만 지키고, 불확실한 '미래'는 그만 생각하라 하지요. 그런데 이는 '미래'의 행복을 포기하고 '현재' 행복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과거'에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행복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가 '현재'가 된 '미래'에도 계속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미래"

그런지가 엊그제인것 같은데 이제 '미래'를 이야기 하지요. 변화의 속도가 무척이나 빠릅니다. 한 세대를 살기도 전에 중심이 '과거', '현재', '미래'로 훅훅 바뀌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적응이 안 됩니다.

한편에선 '미래'형 인재를 요구합니다. 양자역학과 인공지능은 기본으로 알아야 해요. 경험도 있어야 하고요. 차라리 지구인 말고 외계인을 뽑으시지요. 현재인 말고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온 사람을 찾아보세요. 너무 앞서가시는군요

'미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이지요.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일 것도 같습니다. 어떻게 될지도 모를 '불확실'성에 대한 배팅이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미래'에 관련된, 예전 같았으면 무모하다고 말렸을, 일들이 많이 뜨고 있지요.


$ 딱 10년 후, 그리고 10년 전


그래도 미래는 너무 추상적이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딱 10년 후의 미래만 가정해 볼까요?

10년 후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이하게 될 현실적인 미래이지요. 그래요 10년 후는 어떨 것 같나요? 

자동차가 막 날아다니고,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고, 주 4일제가 되어서 3.5일의 주말을 보낼 수 있을까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만. 10년 후면 20년 된 아파트도 아직 재건축될까 말까 한 시기잖아요?


10년 후의 미래가 어렵다면, 그럼 10년 전에는 현재라는 10년 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한편으로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는 것도 같네요. 

그것을 체감하고 있지 못함은 바로 우리가 달리는 열차에 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포노 사피엔스(스마트폰족)의 등장이 제일 극적이지요. 드라마였지만 동면에서 10년 만에 깨어난 사람은 가장 먼저 스마트폰만으로 적응의 혼란을 겪게 되지요. 

인공지능은 가공할 만한 속도로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들을 채점하고 명령도 내립니다. 드디어 영화에서나 보던 로봇의 지배가 시작된 것인가요? 가상현실과 3D 컴퓨터가 상상의 현실을 실제로 만들어 내지요. 게임은 벌써 그렇습니다. 신약을 통해 질병을 정복해나갑니다. Covid19 백신과 치료제를 몇 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 내고 떼돈을 벌고 있어요. (10년 전 같았으면 다 죽었을 수도) 우주에 관광을 보내고, 전기로 차를 충전하고 자율 주행을 합니다. 고기도 아닌 대체육도 맛있다지요.


한편으로는 변화가 꼭 전진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분야의 변화는 너무 빠른 반면, 어떤 분야에서는 후진과 역주행을 하기도 합니다. 자살골을 넣지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원조가 없으면 기아로 굶주릴 수밖에 없다고 하지요. 한쪽에선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데 한쪽에선 우주선을 타고 신이 세상에 내려오지요. 그리곤 율법을 어긴 자들을 처형하지요. 현재의 Yolo는 고사하고 과거로의 회귀이지요. 귀족 아니면 노예입니다. 노예일 확률이 로또에 당첨되지 않을 확률이지요.


$ 왜 미래인가?


그렇다면 이제 와서 왜 미래일까요?

인간은 '미래'라는 불확실성을 극도로 기피하는 존재였는데 말이지요.

'미래'에는 역시 큰 판돈이 걸려있는 까닭이지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과거'에도 역시 '미래'는 석유나 셰일가스처럼 고요히 매장되어 있었을 겁니다. 다만 채굴 비용이 너무 커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을 뿐이지요. 가끔 예언자가 나타나서 순 감으로 여기 석유가 묻혀 있다고 가끔 말했겠지요.

그런데 '미래'에 대한 판돈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리스크를 테이킹 할만한 순간이 된 것이지요. 또한 과학의 발달과 사업가의 투자로 미래에 대한 예측과 투자가 가능해졌다는 점도 갑자기 '미래가 각광받는 이유이겠지요.

그래서 지금의 '미래'는 과학자와 사업가의 영역이지요. 단 정치가는 미래를 약속하지만 여전히 지키지는 않아요. 그들은 현재가 중요하고 아직은 과거의 부활을 좋아하는 듯합니다만.


앞으로의 10년은 아마 과거의 10년보다 훨씬 빨라질 것이지요. 인간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으니까요.

걷다가, 말을 타다가,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드디어 기차를 타고 자동차를 탔지요. 그리고 고속열차를 타고, 하늘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주선을 타고 갑니다. 시공간을 떠나서 인간의 진화는 속도의 진화이지요. 그만큼 삶의 속도도 빨라졌고 앞으로의 10년은 과거의 10년보다 엄청난 속도로 변화할 것이란 사실입니다. 어지러울 수도 있으니 꽉 붙들어 매야 합니다. 무얼요? 글쎄요?


과학자도 사업가도 아닌데 그렇다면 미래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양자역학과 인공지능을 이제 와서 배울 수도 없는데, 신약을 개발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지금부터 '미래'의 적응은 꽤나 험난해 보입니다.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인공지능(AI)의 노예가 되어 짤 수 없는 알고리즘 대신 그들의 알고리즘에 맞추어 걸러지고, 점수 매겨지고, 시키는 데로 움직이다가 폐기 처분될  운명 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후진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역주행도 어렵습니다.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 상상력


결국 남은 것은 딱 하나 '상상력'하나이네요. 

미래에서 온 인간을 찾는 다지만 그런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마련이지요. 외계인도 없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미래에서 왔다는, 외계인인 보냈다는 설은 있습니다만)

그러므로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력'이, 혹은 '창의력'으로도 불리는 것이 유일한 무기이지요. 특히 양자역학도, 인공지능도 신약도 개발하기 어려운 문과생들 에게는 그렇습니다.


결국 '미래'란 상상했던 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고 그 지향점이었지요. 그것을 향한 행동과 도전이 '현재'의 '미래'를 만들어 나간 것이겠지요.

그래서 '상상력'만 가지고 있는 자들은 현대의 '예언자'이지요. '상상한'만큼, 혹 '예언한'만큼 미래는 그려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예언가가 되어 보려 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되려는 건 아니에요) 글은 원래 상상의 산물이었죠. 머릿속에 그려낸 것을 추상적으로 그려낸 것이니 가히 알고리즘이자 예언의 영역이 아니었나 싶지요.


그래서 '미래'를 씁니다. '상상력'으로.


컨버전스 2030 미래의 부와 기회 (앞으로 10년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한줄 서평 : 미래를 마주하는 자세에 대하여, 그런데 부는 어디에 (2021.03)

내맘 $점 : $$$$

피터 디아만디스, 스티븐 코틀러 지음 / 박영준 옮김 (2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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