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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Nov 02. 2021

광고라는 주술에 빠지지 않으려면

광고를 뒤바꾼 아이디어 100 ($$$)

$ 광고라는 신학문


한때 '광고'라는 명칭이 붙은 학과가 신설되고 인기를 끈 적이 있었지요. 그때 우리는 구(舊)학문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뭔가 신(新)학문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옷차림이나 행동도 앞서 나가는 듯 보였지요.

하루는 수업의 발표 시간이었는데, 우리는 지금은 유물이 된, 투명 필름에 글씨를 인쇄하여 프로젝터로 그것을 겨우 띄워 읽던 수준이었습니다. 그것도 처음 해본 것이었지요.


그에 비해 그들은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빔 프로텍트로 멋지게 쏘더니 화면이 막 움직였었습니다. 지금이야 파워포인트쯤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심지어 그마저도 유물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것이 파워포인트였으며, 애니메이션 효과를 줘 슬라이드쇼를 했다는 것은 나중에 회사에 다니고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요.


이후 그들이 광고 에이전트에서 이름을 날리고, 여전히 앞서 나가며, 지금 우리가 보는 광고를 만들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파워포인트와 빔프로젝트를 다룰 줄 알았건 몰랐건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요. 사회로 나가는 통로는 비슷하게 좁았으며, 군대에 입대하는 것과 비슷한데 까다롭게 굴었으며, 유람선인 줄 알고 탔는데 타보니 노예선이었어요. 아이쿠


$ 이건 미세먼지나 자외선이지


사실 광고를 좋아하긴 했었지요. 한때 TV에서는 광고만 신기해서 채널을 돌려가며 보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한다'고 이제는 광고가 보따리를 통째로 앗아갈 기세지요.

흔한 TV만 해도 이제는 프로그램을 보는 것인지 광고를 보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광고가 많지요. 예전에 잡지책을 보면 대부분이 광고로 이루어진 책이 생각나는데 이제 비슷한 수준입니다.


심지어는 이제 프로그램 사이에 중간 광고까지 보아야 하지요. 공중파에서는 중간광고를 제한한다고 하니 아예 프로그램을 두 개, 세 개로 쪼개서 그 사이에 광고를 끼워 넣었지요. 이러한 편법은 왜 규제하지 않는 것일까요?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광고 수입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지요. 그것은 순전히 우리가 거기에 무제한적으로 노출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광고는 한때 재미있기도 했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미세먼지나 자외선과 다를 바 없지요. 마스크나 썬크림도 주어지지 않은 채 강제 노출되고 있지요.


$ 수신료를 받을 것이 아니라 광고시청료를 내놓으시지


이쯤 되면 TV 수신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방송 채널이 확대되면서 '정크 프로그램'도 급속도로 늘어났지요. 다른 프로그램을 부끄러움도 없이 베끼고, 왜 나오는지 모르는 인물들을 끼워넣기로 등장시키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가지만 어쩌다 권력을 차지한 인간들이 순위를 매기며 씹고 뜯고 맛보는 프로그램들이 넘쳐 나지요. 그리고 그것을 부양하는 것은 그 사이사이 끼워 넣은 광고의 도배지요. 그리고 그들의 광고를 부양하고 있는 것은 거기에 볼모로 잡힌 바로 우리지요.


$ 광고는 주술


광고라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현혹을 위해서 탄생한 것이기에 종교적인 숭배나 사회적인 세뇌에 가깝다고 봐야 하지요. 즉 본래부터 공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약점을 그대로 파고들어 흔들어 놓기 위한 악마의 주술에 가깝지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지요. 잦은 노출에 세뇌되기가 쉽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어떠한 것을 숭배하고 싶어 하는 종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첨단의 기술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광고의 세계지요. 그 뒤에는 '브랜드'라고 불리는 교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 책은 그 브랜드 교주 100이 이끈 광고의 역사이지요.


$ 보따리 단디 매시길


그러므로 이 책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광고를 뒤바꾼 아이디어 100'이겠지만 그들을 제외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넋을 잃고 세뇌당한 100'의 역사라고 할 것 같네요. 대놓고 심하게 말하면 '보이스피싱'과 다를게 없이 어이없이 보따리를 털렸다는 것이지요.


광고는 사실 아름답지 않아요. 철저히 상업주의를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물론 아름다움이나 뛰어난 창의성을 보여줄 때도 있지만, 반드시 인간을 세뇌시켜 물건을 구매하게 하는 목적이 숨어 있지요. 그러므로 광고는 '사랑'이라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미약'이기도 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혼인을 빙자한 간음' 이지요. 심지어 공익 광고라도 행동 교정을 위한 목적이 도사리고 있지요.


이러한 광고의 비용은 자본주의 세계를 사실상 움직이고 있지요. 브랜드 교주들은 광고비를 마구 뿌립니다. 그래야 더 많은 신도가 모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광고 수익은 방송국이나 거대 플랫폼이나, 정크 프로그램이나, 정크 패널들이 받아야 할 몫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가 받아야 할 몫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두 번 지불하고 있는 셈이에요. 광고를 볼 때 한번, 물건을 살 때 한번.

그러니 광고 볼땐 부디 보따리 단디 매시길!


한줄 서평 : 광고를 뒤바꾼 아이디어 100이라 쓰고 광고에 털린 흑역사 100이라고 읽는다 (2021.07)

내맘 $점 : $$$

광고를 뒤바꾼 아이디어 100 (100 IDEAS THAT CHANGED ADVERTISING)

사이먼 벡스너 지음 / 박성혜 옮김 / 시드포스트 (20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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