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만나기로 한 아침, 무슨 일인지 자꾸 시간을 미뤘는데 신은 뭔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전 내내 기다렸는데 기다리다 못해 목숨줄을 내놓을걸 각오하고 슬쩍 들여다보니 "아니 신이 어젯밤부터 날을 새고 보던 드라마를 끊지 못해 그러고 있던 것이 아닌가!"
이 의뢰를 받으면서 '신의 성격 연구 보고서'가 '막장'으로 가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놀라운 비밀을 알아버리게 된 것이다. 어디에 말하기도 남사스럽지만 "신이 드라마를 좋아한다니!", "그것도 하다못해 막장 드라마를!" 의외인 점은 이 은밀할 것 같은 취미를 알리는데 신이 흔쾌히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드라마 마니아에 대한 자부심이라나 뭐라나?"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신과 취미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내심 반갑기도 했고 동질감, 아니 친근감 마저 느껴졌다. 관심사의 교집합을 바탕으로 더 가까워질 수 있고 이 연구에도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그래도 "막장 드라마라니?" 내가 선호하는 것은 그냥 드라마일 뿐이지 그래도 '막장'까지는 아니었다. 이제 신이 그렇게 시간이 없는 이유도, 넷플릭스 같은 드라마를 통해 신의 의도를 스리슬쩍 흘리는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다. 바로 신이 드라마, 그것도 '막장 드라마 마니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드라마에는 바로 인간의 삶, 희로애락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더욱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자 간접 경험을 통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기에는 개뿔, 신은 인간의 삶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밋밋한 이야기는 재미없으니 롤러코스터를 심하게 태우는 막장드라마로. 신은 원래 꿈이 작가 겸 감독이라고 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리고 드라마 제작을 통해 꿈을 상당 부분 이룬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기대했던 밋밋하고 심심하고 평탄하고 운전대를 놓아도 일직선 아스팔트 도로를 자율주행으로 흔들림 없이 달리는 인생길이 없었던 것이 이해가 간다.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신이 돌보는 인간사는 실제로는 아주 심심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평탄하다 못해 하품이 나야만 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오히려 가장 높은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그랬다가 다시 가장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을 보면, 이미 '인간 드라마'를 통해 신이 '막장 드라마 마니아'라는 증거가 차고도 넘친다.
이러한 신의 성격은 근래에 발현된 것이라기보다는 매우 초기부터 형성된 거의 본성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 속 이야기, 이를테면 이미 기원전 8세기에 작성되었다고 추정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lliad)와 오디세이(Odyssey) 같은 인류 최초의 서사시에서부터 이미 '막장 드라마' 요소가 다분히 가득했기 때문이다.
'일리아드'는 '트로이전쟁'이라는 서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 전쟁이 최고의 미인 '헬레네'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시작된 것부터 훌륭한 막장 드라마의 시작을 알린다. 여기에 더해 이 드라마의 주인공, 무적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발목 뒤꿈치만 강물에 유약 처리가 안 돼 하필 거기에 화살을 맞고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은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수없이 우려먹는 '막장' 인생사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뿐만 아니라 '오디세이'의 막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트로이 전쟁'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서사시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원정 후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수없이 표류하고 마는 막장 인생사를 보여준다. 그중에 자신을 사랑하는 님프 '키르케'와 살림을 7년이나 차렸음에도, 이를 버리고 결국 그 애인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아내에게 청혼한 108명의 구혼자들을 모두 처치하고 아내에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의 진수라 할만하다. "무려 108명의 구혼자들을 쓸어버리다니!"
신은 이렇게 초장부터 드라마 마니아였고 인간은 그 드라마 속 막장을 감당해야 할 배우로 창조되었다. 다만 그 배역이 주인공급이냐 행인1, 행인2와 행인3 같은 조연급이냐, 혹은 주인공의 대척점에 서는 빌런의 역할이냐만 다를 뿐이다. 주인공급 역할은 그만큼 힘든 임무가 주어진다. 때론 악플에 시달려야 하기도 하고 대사도 많고 스턴트도 감행하다 다칠 수도 있다. 그 대신 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싸인을 해주며 마치 신이 된 듯한 기분을 잠시 체험할 수 있는 보너스가 있다. 반면 평안한 삶을 원한다면 조연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다만 이것도 주인공을 위해 이름 없이 배역이 사리지거나 빌런에 붙었다가 하루 아침에 역시 사라지는 배역에다 최저 시급, 시간으로 때워야 해서 쉽지않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빌런은 주인공은 아니지만 최근 비중이 높다. 주인공을 힘들게 하는 대신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자리가 주어지기도 하고 부와 권력이 따르기도 한다. 세상에 빌런이 많은 이유이다. 점점 힘든 히어로역 지원이 적어진 반면 빌런역에 대한 지원은 폭주하고 있다. 드디어 빌런이 환호받는 '막장 드라마'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신의 고민이 있다. 아무리 막장이라도 드라마의 결론은 히어로가 빌런을 마침내 물리치고 나머지 행인1, 행인2, 행인3 같은 조연까지 구해야 시청자들의 거센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데 이러한 드라마의 공식이 점점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드라마의 재미는 역시 역경과 반전이다. 그래서 인생은 역경에 역경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숨 막히는 엇갈림으로 잘 될 것 같은 사랑을 멀리 보내버려 방황하게 하기도 하고, 거의 까무러치기나 죽기 직전까지 밀어 놓고 바로 극한에 이르러서야 시청자들의 참을 수 없는 염원에 힘입어 살려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었다가 부활시켜 주고 죽었는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다는 '막장'이 자주 반복되는 것이 드라마가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신은 작가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작가가 작품을 마음대로 쓰고 아무리 막장,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써도 연기자는 작가의 대사에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처럼, 특히 혼신의 연기에는 신도 감명하여 다음에 더 나은 배역을 약속하는 것처럼, 신은 이미 여러 편의 '막장 드라마'를 성공시킨 바 있는 인기 막장 드라마 작가이다. 그리고 감독도 겸해 그 작품을 인간 세상사에 실제로 구현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맡은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인생이 반전과 막장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고 '푸시킨'은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같은 작가로서 신의 '막장 드라마 마니아" 성향을 알아본 것임에 분명하다. 단 그 시절에는 나처럼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해 그렇게 시로 이야기한 것이리라.
푸시킨의 삶은 실제로도 막장 드라마 한 편에 가까웠다. 그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러다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곤차로바'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그때 이미 13살 연상이었던 남편과 사별한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런 그녀가 염문을 일으켰다는 투서를 받게 되자 푸시킨은 '당테스'라는 처제의 남편과 결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이틀 후 죽음을 맞이한다. 막장 드라마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는지, 죽음의 순간에 서재에 꽂혀있던 수천 권의 책들을 향해 "안녕, 친구들!"이라고 말했다고 하고, 부인에게는 용서와 자유로운 삶을 허락했다고 하니, 그의 시가 이제 다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므로 신에게 섣불리 눈물 흘리지 말지어다. 왜냐하면 신은 '막장 드라마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이번 생이 개고생 하는 주인공 히어로이거나 혹은 아니라고 낙심하지 말고, 사는 게 너무 쉽다면 빌런 배역일 확률이 높으니 그러다 한방에 훅 가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행인1, 행인2, 행인3, 조연의 그저 평안한 배역을 달라고 갈구해 왔건만 감독을 친히 자처한 신은 배역 바꿔치기도 꽤나 좋아하니 조연이라고 해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 무얼 갑자기 시킬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너무해", "너무하다고요!"
그러나 신이 '막장 드라마 마니아'의 성향을 쉽게 바꾸는 것은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점점 더 히어로의 배역 비중을 늘리고 빌런의 배역비중을 줄일 필요는 있다. 히어로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지원자가 점점 줄고, 빌런은 얻는 것에 비해 너무 쉽고 명성도 히어로에 비해 만만치 않게 되어서 불균형이 초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연들의 안정된 스케줄을 보장하기를 권고해 본다. 주인공 히어로나 빌런 외의 조연들의 삶까지 그렇게 극단적으로 치닿을 필요가 있는가? 즉 너무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에서 예전 눈물 흘리며 보던 잔잔바리 '감성 드라마'로의 복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