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I 일까? E 일까?
결국 신은 화부터 냈다. 이게 얼마짜리 용역인데(보수 약속도 아직 안 했으면서) 싸구려 MBTI로 감히 신의 성격을 논하려 든다 한다고. 하지만 신의 ABO 혈액형도 아니고 신의 生年月日時 사주부터 알아보자고 하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요즘 소개팅은 다 MBTI에서부터 시작한다고(소개팅해 본 지 하도 오래라서 확신은 들지 않지만), 최신 유행에 뒤처지고 있는 그것이 문제라고 오히려 핀잔을 준다. 어디서 들어본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말도 있지 않냐고 하자 더 이상 반박하지는 못하고 화는 좀 누그러들었다.
그래도 신이니 특별 예우를 적용해 한꺼번에 다 이야기하지 않고 이번에는'I'일까? 'E'일까? 만 꼼꼼하게 연구하기로 했다고 설명한다. 알다시피 'I'(Introvert)는 내향형을 가리키고 'E'(Extrovert)는 외향형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쉽지 않은가? 누가 봐도 신은 'I'가 아니던가? 아닌가? 신은 많은 민원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직업의 성격상, 그렇지 않아도 인간 앞에 나서서 잘난 척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신의 특성상 'E'일 수밖에 없다고?
신은 처음에는 외향형 'E'였을 것이다. 특히 제일 '잘 나가던' 시절, 즉 우주를 창조하고 지옥도 신축으로 대대적 분양을 시작하고, 천사고 악마고 모두 정규직으로 대규모 공채를 실시했을 의욕이 넘쳤을 때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 신에 대한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혼잣말로 욕이라도 한마디 하면, 그러한 자들 잡아내 목도 따주고 불에도 던져 넣어주던 팬클럽이 있었을 때 말이다. 그때는 자신감 뿜뿜 "내가 바로 신이로소이다" 'E'의 성격이 절정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나댄 나머지 사생팬들이 생겨나 문제를 일으키고 악마뿐만 아니라 천사마저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 시작하면서 신의 성격은 급격히 내향형 'I'로 변하고 만다. 심하게는 한때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 회피성 성격장애) 증상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최고 스타였다가 인기가 급강하한 연예인이 보이는 증상과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이 증상은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문제나 인간들의 민원(기도)이 과도하게 몰릴 경우 아직도 회피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기서 신은 다시 한번 크게 화를 냈다. 정확히 '잘 나가던'이란 말에 격분했는데 어찌나 화를 내던지 다음 주 날씨에 따르면 낮 최고 기온이 예년 대비 무려 섭씨 2도 이상 상승할 것으로 예보되었다. 지금 잘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잘 나가거나 언제나 잘 나가야 신인 것인데 그렇게 대놓고 현실을 들은 적이 없어서 현타가 와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더니 '잘 안 나가도 신'이라도 이렇게 무서운걸 직접 보니 의뢰를 수용한 것에 살짝 후회가 됐다. MBTI 성격탐구 네 번, 어찌 4주는 버틸 수 있겠지만 그다음부터 신의 변화를 이끌어 낼 만한 신통한 결과를 내놓아야 할 텐데, 이것 참 내가 무당도 아니고...
이렇게 신의 성격이 'I'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신이 초기에는 모든 일에 적극 나서다가 이제는 웬만한 일에 섣불리 나서기를 꺼려하는 모습이 그렇다. 위에서 이미 결론 내린 대로 언제부터인가 일이 잘 안 풀렸을 수도 있다. 기도와 수련 같은 것을 중요시하는 분위기로 팬클럽을 키우면서 'E'가 과도해서는 곤란한 걸 깨닫고 보다 'I'를 강조했을 수도 있다. 신이 일일이 나서기보다는 대주주의 지위에 머물며 제물을 향유하는 전문경영인 체재가 효율적이라는 경영학 이론을 도입해 보았을 수도 있다. 나름 좋은 CEO 신이 되기 위해 자율성을 보장하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교주들이 이사회를 장악하고 마음대로 떡을 주무르자 최대주주로서의 존재감과 위엄을 급격히 상실하고 경영학 박사학위를 내동댕이 쳐 버렸을 수도 있다.
오늘날 신의 'I' 편향 성격은 여러 가지 불균형을 초래한다. 예전 같으면 신이 개입하면 쉽게 해결될 일에도 다소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는 명백히 'I' 성격의 발현으로 인한 문제로 보인다. 특히 해결 방법을 신 스스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의 직접적 만남을 극도로 꺼리고 카톡 메시지에도 답을 안 하거나, 심지어 읽씹. 소문에 의하면 아예 카톡을 탈퇴했다거나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설마 손 편지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죠?"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때린다.
한편 'E'나 'I'를 나누어 만든 것도 생각해 보면 다 신이었기 때문에 신은 성격의 중립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너무 'E' 나 'I'로 기우는 신의 성격은 위에서 연구한 바와 같이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신에게 일일이 찾아갔고 먼저 연락하는 이만 겨우 만났지만, 이제는 신이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 마인드를 가질 때도 되었다. 심지어 공무원도 그 잘 나가서 모두가 되고 싶어 하는 의사도 요즘은 친절하다. "아니 공무원이나 의사랑 신이랑 비교하는 건 아니고요, 덜덜, 솔직히 공무원이랑은 좀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신은 겉은 쌀쌀맞게 행동하지만 속은 좋아하고 부끄러워하는 태도(츤데레)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이러한 '얼굴 없는 가수', '신비주의 전략'이 더욱 'I' 성경의 고착화를 부추기고 있다. 신의 잘못은 아니다. 조심스럽게 이미지 마케팅 전략 담당자 교체를 권고한다.
그렇다고 'I'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성질'대로 하지 않고 수많은 비난과 감당하기 어려운 민원에도 심사 숙고 하는 태도는 신의 장점이다. 초창기와 같이 섣불리 설레발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쉽게 화를 내면 지구의 온도가 급 상승해 버리는 것처럼 인간이 못 마땅해도 화를 참고 인고의 수련을 하다 보니 'I'로 성격이 굳어졌을 수도 있다. 설마 수련이 아니라 'E'의 진짜 성격을 숨기고 'I'인척 소문을 퍼뜨렸거나, 인간 말고 딴 인간, 즉 다른 은하에서 외계인과 룰루랄라 매일 밤 클럽에서 원래 'E'성격대로 파티를 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신 정보에 따르면 화를 참고 있는 신이 결국 인간을 쓸어버리기 위해 400년 후에 지구에 도착할 삼체인을 먼 우주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이러한 정보가 유출돼서 만들어진 것이 '네플릭스 시리즈'인 '삼체(The Three Body Problem)'로 제작되었으며 '성삼위일체'라는 어디서 들어본 신의 교리와 비슷하여 놀란 바가 있다. 신은 이 질문에는 본 용역과 관계가 없다며 답을 회피하였다.
하지만 반신반의하던 의심 많은 성격과 'I'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억눌려 있던 화를 기꺼이 누그러뜨리고 신의 성격 논란에 다소 수긍하는 듯한, 그렇다고 화끈하게 인정하지도 않은 'I'다운 태도를 보이며 신은 이미지 마케팅 전략 담당자를 교체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을 바공식적으로 취했다. 그런데 잘하다가는, 아니 잘못하다가는 그 담당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싸한 느낌이 드는건 무엇 때문일까?
ps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대해 목차라도 넣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비밀유지 조항을 들며 신은 반대하였다. '프라이버시'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