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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Jan 15. 2024

먼저, 교과목으로서의 영어

  


  입시영어, 끝에서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수능 영어는 절대평가입니다.

  10점 간격으로 같은 등급을 받습니다. 평소 영어 공부를 그렇게까지 안 하는데 시험에 필요한 요령을 총동원하고 전에 없는 초집중 모드로 문제를 풀어 71점을 받아낸 학생과 시험 당일 감기 기운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아쉽게 79점을 받은 학생은 같은 2등급입니다. 절대 평가의 이런 가능성 때문에 수능 영어는 다소 만만한 영역으로, 때로는 적당한 수준까지만 공부하는 과목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같은 이유로  9점대의 경계에 걸려 점프하지 못하면 내내 목에 걸린 가시 같은 과목으로 남습니다. 애매하게 공부해서는 애매한 결과를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절대평가 등급의 차이는 그 간격인 10점이 아니라, 경계에 걸리는 한 문제의 배점, 2점입니다. 그 한 문제를 더 맞히기 위해서는 단어나 문법을 열심히 하는 것 이상의 내공이 필요합니다. 


   고등 영어는 모의고사와 내신을 교차하며 매달 시험을 치릅니다. 일 년 내내 고등학생들이 바쁜 이유입니다.  

   교과서 지문은 수능 지문만큼 낯설거나 어렵지 않아 변별을 위한 평가가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고등학교 내신의 시험범위는 교과서 지문을 기본으로 ( 난이도 조절을 위해 상대적으로 쉬운 교과서는 애초에 제외하는 학교도 상당합니다.) 외부 문제집이 한 두권 추가되고, 기출 모의고사 독해 지문 1~2회 분량이 추가됩니다. 별도의 단어교재도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지정합니다. 범위가 정해져 있으므로, 모두의 공부 목표는 명확합니다. 주어진 범위 내 텍스트를 다 '보기는' 했는가, 그 내용을 제대로 '알고' 보았는가, 이해는 물론 툭 치기만 해도 앞 뒤 지문이 튀어나올 만큼 인가, 학교별 출제 경향을 파악했는가 등의 단계에 따라 결과 점수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물리적인 학습량이 관건입니다. 

   교육 과정이 바뀌면 평가 방식이 다소 모양을 달리할 수 있겠습니다만 학생들은, 결국 그들을 변별하고자 목적하는 시스템 안에 있습니다. 어떤 교육 과정 안에서도, 필요한 점수를 얻기 위해 기준에 맞는 실력을 갖추고 치러야 하는 시험 유형을  파악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게다가 고등학교 영어 수업 시간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중학교 때, 영어는 주요 과목인 만큼 모든 학생이 기본 과정은  다 하고 왔을 것이라 전제합니다.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선 학생의 수도 적지 않습니다. 잘하거나, 아예 모르거나. 교실 내의 수준 차이가 큽니다. 때문에 내신 영어는 상향평준화를 지향하기보다 풀어내기 어렵다기보다 까다로운 문제들로, 혹독한 방식으로 변별합니다. 

   

   중학교 영어는 교과목에 대한 전반적인 학습 방법을 익히고 기본 수준의 과정을 배웁니다.

   배운 내용을 중요한 순서대로 가려내고, 정리하고, 외우고, 문제로 풀어낼 수 있는지, 배운 것을 시험의 형태로 점검할 수 있는지, 그것들을 한정된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를 평가합니다.  

   흔히 중등 영어 내신은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교과서 범위를 알파벳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외우면 백점, 본문만 외우면 80점 이상, 본문도 안 외우면 글쎄......라고 말합니다. 아직 어려운 수준의 응용이나, 문제를 넘어서는 이해와 추론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무식한 공부를 필요로 하고, 그것만 잘 해내면 원하는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시기입니다. 단순하게 버티며, 공부의 본질인 귀찮음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잘 겪어내고 나면, 버텨낸 당사자만이 얻을 수 있는 엉덩이의 힘이 생깁니다. 고등학교 영어 시험 범위를 적어도 다 '보고' 시험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 들어서는 학생들에게 혼란과 부담이 생겨납니다.

   지금의 영어 교육은 조기 영어를 넘어 아기 영어에서 시작됩니다. 즐겁고 신나는 영어 배우기는 보호자의 노력과 투자에 따라 귀엽고도 유창한 또 하나의 언어가 됩니다. 아이는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말하면서 영어로 소통하게 됩니다. 하나 이상의 언어를 갖는다면, 하나 이상의 세계를 살게 되니 부럽고 멋진 일입니다.  

   다만 입시 교육으로 들어가 만나는 영어는 유창한 소통능력과 비례하는 결과를 얻기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외국인하고 말도 잘하더니 중학교에 가서 영어 점수가 안 나온다며 아이들을 잡으면 안 됩니다. 충분히 했다고 당연히 잘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영어를 말하고 들었건만, 듣기 평가에서 안 들리는 문장은 나옵니다. 문제집을 풀다 보면 여전히 단어에서 막힙니다. 문법 책을 여러 권 뗐지만, 시험만 보면 문법 때문에 긴장이 됩니다.


   학생의 역량 부족을 다그치기보다, 다르게 해야 함을 인정할 때입니다.

   학습의 형태로 접근하고, 평가 기준에 맞추어 공부하고, 수행 결과에 따라 이전의 공부법을 수정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과목들처럼 '공부'해야 합니다. 원하는 점수를 받으려면, 열공이 필요한 하나의 교과목이어 합니다.

   

   보호자들은 졸업하면 쓸모도 없을 학교 영어를 하느라 제대로 말하던 영어를 잃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회화와 학교 영어, 입시 영어를 대척점에 두고 말하지 못하면 어차피 소용없다는 식으로 함부로 말합니다. 다 커서 다른 언어를 배우려면 새 단어도 알고, 그 언어의 규칙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게다가 어떤 형식이든 시험을 보고 해당하는 평가를 잘 받으려면, 학습을 해야합니다.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는 과목은 없고, 영어도 그 중의 하나가 될 뿐입니다. 자연스러운 습득이 가능했던 제2외국어로서의 정서를 고집하며 변함없이 말'도' 잘해야 하고, 이제까지 해온 게 있으니 영어 시험'도' 당연히 잘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둘 다 해내고, 심지어 더 잘 해내는 학생도 있습니다만 힘겨워하는 아이들이 다수입니다. 아이들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달라진 환경을 실감하고 태도를 재정립할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칫 둘 다 내려놓지 않도록 말입니다. 한 데 묶어, '영어를 잘하라' 말하기보다, 차라리 두 과목인양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라 하는 편이 현실적인 조언입니다.

 

  달라진 학습 환경에 적응을 마치고 나면, 그러니까 교과목 영어 공부 방식에 익숙해지고 나면 어린 시절의 '영어들'이 든든한 디딤돌도 되고, 가속을 내는 추가 엔진이 되기도 합니다.  조기 영어 경험이 없던 학생의 경우, 영어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다가 언어적 능력이 성장하며 자신감을 얻고 교과목을 넘어 외국어 영어로 관심이 깊어져 유학이나 연수를 준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또 다른 시작을 맞습니다. 


   입시는 실은 줄을 세우는 과정입니다. 이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무리한 욕심을 내기보다 짧지 않은 6년을 보내기 위해 효율을 따져봅니다. 당사자가 온전한 주체여야 하는 입시의 세계에서 학생 스스로 살아남도록, 말도 많고 기대도 크고 잘하는 사람도 차고 넘치는 '영어'에 대한 보호자의 입장을 달리해보길 권합니다. 훨씬 가볍게 출발하고, 접근이 쉬워질 것입니다. 

   일부를 잃거나 어렸을 때 겪은 배움이 쓸모없게 될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국엔 모두 모여 멋진 성장을 이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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