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꼼짝 마!
우리 집 축구선수의 일과는 다음과 같다.
- 6교시하는 날 3시 반, 7교시하는 날 4시 반 하교.
- 휴대폰 들고 간식 먹으며 휴식, 운동 갈 준비.
- 4시 50분 훈련 구장으로 이동.
- 6시부터 8시 훈련, 정리하고 8시 20분쯤 집으로.
- 씻고 저녁 식사.
- 책상 앞에 잠깐 앉기.
- 11시 취침.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나 일정을 보면 그리 빠듯하지 않으나, 주인공이 청소년이다. 장소 간 이동 혹은 일정 간 이동에 있어 급할 게 없는 양반네처럼 움직이니, 실제로는 늘 바쁘고 여유가 없다.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아이는 훈련 시간만큼은 꼭 지켰고, 지금껏 힘들다고 투덜대지 않았다.
이만하면, 여기까지 해냈다니 충분히 대견하다. 달라진 시간표에 맞춰 스스로 알아서 생활하기까지, 두 달 정도 걸렸다.
6학년 때 아이는 주일 예배가 끝나면, 한 시라도 빨리 동네 친구들이 놀고 있는 운동장으로 가려했다. 하도 재촉을 해대니, 교통 카드를 들려주고 카카오맵 사용과 대중교통 이용법을 가르쳤다. 일 년을 그렇게 다니더니, 지금은 교통 카드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여긴다. 그 경험 덕분에 낯선 장소를 겁내기보다 필요에 따라 지도를 먼저 검색하는 아이가 되었다. 자신의 세계를 물리적으로 확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그 이상으로 넓은 세계를 경험하겠구나 기대하게 되었다. 당시엔 혼자 대중교통으로 다니는 게 걱정되었는데, 이맘때의 아이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성장시킨다. 놀러 가던 길이었는데, 훈련 구장으로의 이동을 위한 연습과 준비의 시간이 된 것 같아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이다.
물론 엉뚱한 데서 내리기도, 다른 버스를 타기도 하며 대중교통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경험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추적하는 동안 엄마는 애가 타지만, 지나고 웃으며 하게 되는 이야기들은 다 그런 것들이니까.
공식 훈련 시간은 평일 6시에서 8시.
내가 어렸을 때 본 운동부의 훈련 스케줄과는 사뭇 달랐고, 솔직히 그래서 다행이었다. 합숙을 하지 않는 U15 선수들의 공식 훈련 시간이 대게 그러했는데, 중학생 선수들의 훈련은 의무 교육인 중학교 교육 과정이 끝난 이후에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과거, 학생 운동부는 수업을 째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어릴 때부터 합숙을 하며 새벽, 아침, 점심, 저녁에 운동만 했다. 운동에 죽고 운동에 살기 위해서. 가혹한 일과였고 너무나 많은 것을 놓쳤다. 하지만 다수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달라지면서 학생 운동부의 훈련 환경도 바뀌고 있다. 학생의 기본 학습권 보장, 성장기에 적합한 훈련, 목적 그 자체가 되기보다 선택 사항 중 하나가 되는 운동, 등의 이슈에 다양한 생각들이 반영되고 있다. 유소년 축구의 전통이 오래된 나라로부터 운영 시스템을 도입하고, 바탕이 되는 철학도 따라 들어오며, 관계자들의 사고방식이나 시스템에도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덕분에 아이는 소중한 두 시간을 달리고, 공을 차고, 혼나고, 배우고, 발과 생각의 불일치에 고뇌하고, 틈틈이 즐거워하며 훈련을 받는다. 알차게.
귀가는 아빠 찬스. 두 사람이 귀가해 씻고 저녁 식탁에 앉으면, 부지런한 날 기준으로 9시쯤 된다. 식사를 마치고 소화를 좀 시킨 후 책상에 앉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이내 졸음이 몰려오니 그만 잘 시간이다. 아이는 열한 시가 되기 전에 눕고, 눈 감은 지 5분이면 꿈나라다. 긴 하루는 순식간에 밤을 맞는다.
주말에는 공식 훈련이 없지만, 사실 훈련 없이 보내는 주말은 거의 없다. 감독님이 개인 시간을 내어 소집하고 다양한 형태로 훈련을 시키신다. 일정이 잡히면 아프지 않은 한 모든 훈련에 참석하기로 (우리끼리) 약속했으므로, 이제 주말에도 예배나 가족 식사 말고는 별도의 일정을 잡지 않는다.
회사에서 운동장으로, 운동장에서 집으로, 그이의 퇴근 여정은 이전보다 세 배쯤 길어졌다. 점심과 저녁 식사 사이의 텀도 길어졌고. 퇴근 후 하던 개인 운동은 새벽으로, 그 조차 어려운 날은 운동장 주변 산책으로 대신한다. 외부 약속을 줄이고, 좋아하던 캠핑을 ‘일단’ 접었다. 퇴근박으로 솔로 캠핑을 다녀오긴 했지만, 캠핑이 그립다는 아이의 말에 그마저도 멈추었다.
나 역시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그이와 아이가 돌아오면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해 먹이고, 치우고, 조용조용 모드로 땀에 젖은 유니폼을 세탁하고 나면 집안일 퇴근 시간이 열한 시. 이전에 비하면 두 시간 반이나 초과 근무다.
그이와 나의 주된 관심이 아이의 축구로 옮겨간 것은 사실이나, 우리로선 아직 희생까지는 아니고 저녁 시간의 휴식과 여유를 내려놓은 정도, 한 달에 겨우 한 번 그 좋아하던 여행을 포기한 정도, 놀자고 계획하는 즐거움을 애초에 그만둔 정도…… 그 정도이다. 운동하면 다른 거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고,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시간상으로 하루 두 시간, 길어야 세 시간인 아이의 훈련이지만 우리는 그야말로 일단, 꼼짝 마!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약속은 약속이고, 시작이 다소 늦었으니 더 열심히 해야 하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으니까 접을 건 접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았다. 운동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스케줄 덕분에 저절로 마음까지 결연해졌다.
그이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이기 때문도 있고, 한 사람이 행복하게 달리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는 아침이면, 알람을 끄고 일어나 엄마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등교를 한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핸드폰을 보며 간식을 먹다가도 시간이 되면 커다란 백팩을 메고 버스를 갈아타고 한강을 건넌다. 유니폼이 땀으로 푹 젖은 채 아빠와 집으로 돌아오고, 저녁 식사가 소화되기도 전에 잠든다.
자신의 몫을 살아내는 중이다. 그런 아이의 하루를 가만 들여다보면, 이런 일상이 반복되고 이어지는 것이 정말이지 다행이고 축복이다.
운동을 시작한 지 6개월, 달라진 시간표는 어느새 당연한 시간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