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친 건가, 놓은 건가?
좋아하는 일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선, 좋아하지 않는 일 아홉 가지를 해야 한다 했다. 이다음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려면, 지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한다고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들의 말이다. 하지만 그 말들의 의미를 알면서도 현재의 즐거움을 미루거나 접어두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실은 대단한 사건이라는 걸 바쁘게 사는 동안 깨달아버린 어른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루를 보내고도, 그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자라고 있는 아이는 열네 살이 되며 축구를 제대로 하고 싶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간절한 바람대로 축구 선수로 살고 있다. 막상 선수가 되니 비 오는 날의 훈련에는 꾀가 나고, 고된 연습 끝엔 입이 저만치 나온다. 시합이 있는 날은 어둠의 기운이 지배하고, 몸이 가벼운 날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감당 안 되는 텐션을 보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너는 축구선수잖아,라는 말에는 이견이 없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이와 우리는 그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들을 포기해 가는 중이다.
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 번, 날씨가 좋으면 두 번 아니 세 번이라도 서울을 벗어나곤 했다. 그이와 나에겐 심폐소생이었다. 일상의 시공간을 탈출해 냄새도 흐름도 다른 바람을 쐬고, 그 바람이 가는 길에 고단한 것들을 실어 보내며 소소한 행복을 누렸다. 아이도 어딘가로 가는 여정을 제법 자연스럽게 즐겼다.
하지만 날마다 훈련을 하는 축구선수에게 여행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어쩌다 주말 훈련이 취소되어도 당일 숙소 예약은 요원하고, 서둘러 출발해도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길에 쏟게 된다. 축구를 막 시작하고 분위기 파악이 아직일 때는, 그러니까 미련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차마 취소하지 못하고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 환불 한 푼 없이 예약들을 날렸다. 오래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여행지를 단념하고는 아쉬움이 침묵이 되어 온 집안에 깔리기도 했다. 당일 여행이라도 갈까 싶다가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다음 날의 훈련이나 시합 출전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짐을 풀고 쉬어야 했다. 훌훌 털고 길을 나서기엔 선수의 일상은 무엇보다 가볍지 않았다.
자녀가 사춘기가 되고 입시에 들어서면, 학원 보충이 싫어서라도 가족 여행이 뜸해진다 들었다. 캠핑하는 사람이라면 그즈음에 캠핑 살림을 정리하느라 당근 마켓 온도가 끓어오른다고도 하더라. 좀 일찍 찾아왔다 생각하는 중이다. 그이도, 나도, 휴게소 소떡소떡이 제일인 아이도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을 접는다. 리그 경기와 원정 훈련 따라다니느라 남은 연차도 별로 없고.
아이는 친구들과의 시간을 마음껏 갖지 못한다. 또래 간의 어울림, 친구들과의 유대가 가장 중요할 때인데, 아이가 아쉬워할 때면 엄마 마음도 짠 하다.
다른 아이들이 학원을 마치고 잠깐이라도 운동장에서 나올 시간이면, 아이는 한창 훈련 중이다. 밤새 수다 떨고 게임하는 파자마 모임이 있는데 훈련 스케줄로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고, 어쩌다 시간이 맞아도 안 자고 놀고 난 다음날 훈련이 더 고되고, 그러다 컨디션이 무너져 병이 나는 일이 있었다. 두어 번 앓고 나더니 파자마 얘기도 쏙 들어갔다. 제 선에서 못 간다 말하는 눈치다. 학교 행사나 외부 활동, 그런 날들의 뒤풀이도 다른 애들처럼 놀지 못한다. 얼른 유니폼 갈아입고 훈련 가야 하니까.
주말 오후엔 온 동네 아이들이 몰려나와 운동장이 북적인다. 사람 많고 공도 많아, 까지고 깨지는 일이 워낙 잦으니 선수가 되고 난 후에 동네 축구를 못하게 했다. 운동장 문 닫고 나오던 담당이었는데, 이유를 납득하니 그저 눈물만 글썽일 수밖에. 반년쯤 지나고 나니 아이가 선수로서 자기 몸을 조심히 쓸 줄 아는 듯하고, 몇 시간 안 되지만 부모가 제안하는 여가 생활보다 친구들이랑 땀에 흠뻑 젖도록 뛰고 들어올 때 더 행복해 보이니, 다 알고도 모르는 척 운동장으로 나가는 걸 내버려 두기도 한다.
아이가 단번에 단단해진 것은 아니다.
그이와 내가 타이르고 설명한 시간이 적지 않고, 아이 스스로 아쉬워하고 후회하면서 돌아선 경험도 많았다. 다만 여전히 아쉬운 중에도, 축구선수라는 자신의 선택을 지키는 방법은 이제 아이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외의 자잘한 아쉬움들을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가 줄었다. 픽업을 맡은 그이는 이제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금요일 밤이면 늦게까지 야식 하며 영화나 TV를 보곤 했는데, 일부러 일상을 흩트리는 불금의 시간도 신데렐라 타임, 열두 시를 넘기지 않는다. 먹고 자고 씻고 관리하는 단순한 일상 루틴을 유지하기 위해 집안일이나 살림이 아무리 귀찮아도 미루지 않는다. 알리미에 소개되는 수많은 학과 외 체험들은 - 축구를 안 했어도 전부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면서- 관심 없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신청조차 할 수 없으니 그렇게나 아까운 일이다. 글을 쓰다 아이에게 포기한 게 있는지 물으니,
“공부? …… 공부는 포기가 아니라 놓친 건가?” 하고 되묻는다.
놓친 것인지 그리로 갈 에너지가 없으니 놓아 버린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공부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만으로도 학생 선수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듯 해 기특하고 넘어가야지.
포기도 아쉬움도 꼬리가 긴 감정을 남기지만, 달랠 방법이 생겨난다.
수년 전 찍어둔 먼바다 사진, 녹음해 둔 개울물 소리, 모닥불 타는 영상을 꺼내어 보며 여행의 시간을 추억한다. 휴식이 필요한 아이는 집에서 뒹굴거리며 배달앱에서 최애 메뉴를 고르고, 그이와 나는 근교의 미술관을 다녀오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우리는 이런 저런 방법을 찾아 각자에게 필요한 것으로 자신의 샘을 채운다.
부시시 아침을 열고,
학교를 다녀와,
간식을 먹고,
운동복을 갈아입고,
버스를 타고가 훈련을 하고,
땀에 젖어 돌아와,
씻고 늦은 저녁을 먹고,
침대에 몸을 내던지며 아, 이거지! 하는.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이자, 불과 일 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아이의 하루다.
단순한 일과들 사이사이엔 말도 많고 탈도 많으나, 여러 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지나, 좋아하는 공을 차며 제 몫을 살아낸다. 아이는.
내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지하고 응원하는 현재의 내 모습이 뿌듯해 어깨가 솟는 기분이다. 그 어떤 양육의 순간보다, 아이 스스로 서는 이 과정을 보고 있자니 기뻤다. 그대로 마음을 전하니,
“뭘요. “ 그런다.
포기가 슬프고 아쉽기만 한 건 아니다.
아이 덕분에 새삼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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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차는 아들과 살고 있습니다> 열 편의 글로 시즌1을 마무리합니다.
아이는 오늘도 열심히 공을 차고 있습니다. 제 눈엔 시작할 때보다 훨씬 잘 차는 것 같고요.
축구를 계속하게 된다면, 이야기를 모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