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흑염소와 신발건조기
“염소까지 다 먹었어요!”
등교하기 전에 비타민 등의 영양제를 꼭 먹여 보내려는 엄마가 나. 먹기 전까지 뒤통수에 대고 계속 얘기하니, 아이는 모두 털어먹자마자 큰 소리로 내게 말한다. 염소까지, 아이는 요즘 흑염소를 먹는다.
키가 170cm에 가까운데, 체중은 저녁 많이 먹고 바로 재야 50kg을 간신히 넘는다. 마른 아이.
어렸을 때 주야장천 뛰어논 덕분인지 기초대사량이 높고, 먹는 만큼 살이 붙는 체질도 아니다. 한 번에 먹는 양이 많지 않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한 그릇이 정량이다. 외식이라면 빼지 않고 따라나서고 비싼 식재료라면 가리긴 하지만, 음식 자체에 욕심이 없는 참 낯선 유형이다. 그저 마른 아이로 살 때는 주변에서 어째라 말해도, 안 크는 거 아닌데 뭐 하면서 대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체격과 체력이 경쟁력인 운동선수가 되니, 가볍고 비만 아니던 아이의 몸은 상대적으로 약체이자 시급한 개선점이 되었다.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그만 먹으라 말하며 키웠는데, 먹이는 일이 양육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 되었다.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처음엔 주워들은 대로 단백질 섭취를 늘렸다.
빵으로 하는 아침 식사의 단백질은 달걀이었다. 날마다 달걀을 삶고 부치고 익히고 굴렸다. 오후 간식은 달콤하고 입에 붙는 것 말고도 너겟이나 고기가 들어간 토르티야처럼 기름지고 열량 높은 메뉴로 챙겼다. 저녁 식탁에는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를 돌아가며 올렸다. 고기 빠진 저녁은 없었고 비상식량 두부는 냉장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레시피가 있어야만 요리가 가능한 사람이다, 나는.
타고난 재능이 미미하고, 메뉴 선정부터 장보기 재료준비 조리 뒤처리까지 그 과정이 너무 길고 먼 길로 느껴진다. 완성된 요리는 그저 우리 가족이 잘 먹으면 그만이다. 음식 사진 촬영의 즐거움이나 요리로 얻는 성취감이 크지 않다. 딱 이만큼의 요리 에너지를 가진 내게, 자식을 먹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이 상황이 처음엔 어려웠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주방에 있었고, 다른 날은 결국 배달앱을 열었다. 먹는 일에 이렇게나 치열한 적이 있었나. 이쯤이면 빠지지 않는 혼잣말, 자식 정말 뭘까. 입이 마르는 미션이다.
그러던 중에 전체 식사량을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우리가 먹는 식탁은 이미 영양이 충분하니 총에너지양을 늘리기 위해 전체 식사량을 늘려주면, 필요한 영양의 섭취량도 자연스럽게 늘 것이라는 논리였다. 수월하게 들렸다. 영양을 고루 갖추고 맛도 있는 급식을 일단 많이 먹으라고 계속 말하는 중이다. 아이는 아무리 맛있어도 배가 차면 식사를 끝낸다. 밥을 몇 그릇씩 추가로 먹는다거나 욕심부리느라 억지로 더 먹는 편도 아니었다. 밥양을 늘려보자며, 저녁 식사의 밥을 매일 한 숟가락씩 늘렸다. 아이 역시 노력 중이다. 국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밥을 말아 한 그릇씩 후룩후룩 남김없이 먹고, 식탁에 일단 차려진 음식이라면 한 번씩은 일단 도전 중이다. 먹어야 힘이 나고, 힘이 붙어야 살아남으니까.
이렇게나 비장하지만, 날마다 두 시간씩 땀을 빼니 살찔 틈이 없다.
열 살이 넘고는 종합 비타민에 봄가을 홍삼만 한 번씩 먹였는데, 마침 선물로 들어온 흑염소가 있어 먹이기 시작했다. 유명한 건강원에서 까맣게 끓여낸 상품은 아니고 남녀노소 누구나 먹을 수 있는 홈쇼핑 판매품이다. 흑염소 함량이 그리 많지 않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씩, 요즘엔 두 개씩 먹이는 중이다. 보약 얘기들을 하는데, 부작용 사례를 너무 많이 봐서인지 선뜻 나서질 못하겠다. 중계방송에서는 개구리 즙 광고가 내내 나온다. 개구리 즙이라니. 혹시 황소개구리일까, 작년 초여름 캠핑장이 떠나가라 울어대던 청개구리 떼가 떠오른다. 뱀도 잡고 잉어도 잡고, 자꾸 뭘 잡으라는데 정말 그물 들고 나가야 하는 걸까. 비타민 C랑 칼슘을 날마다, 아이 이모가 링티를 한가득 보내와 훈련 갈 때마다 한 병씩 싸서 보내는데..... 무려 흑염소를 먹이는 중이니까. 정작 먹는 것은 아이지만, 그로 인해 내가 평안을 잠시 얻으니, 약이 일을 하는 건 엉뚱하게도 내 몸에서인가 싶다. 이 정도면 괜찮지, 싶으면서도 이번 숙제는 끝이 안 보이는 듯하다. 아침에 확인하니 그 흑염소가 다섯 봉 남았던데……
물 많이 마시고, 밥 잘 먹고 잘 자면 됩니다. 결국 이 말만이 유일한 정답이면 얼마나 좋을까.
먹이기를 힘쓰고, 이번엔 입히기다.
아이는 청소년이 되어 의복에 관한 영역에서 가장 먼저 독립했다. 계절과 상관없이 입기, 체육인처럼 며칠간 입기,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입기,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흐린 기억대로 입기 등을 시도한다. 멋진 스타일을 찾아가는 중인가 본데, (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그 경험이 패셔니스타의 시작이라 여기며 내버려둔다. 세탁과 관리까지 가르치는 것이 최종 목표지만, 일단은 아침마다 뭐 입냐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독립에 찬성하는 바이다.
훈련 후 귀가할 때면 유니폼은 물론 속옷에 두꺼운 스타킹, 심지어 축구화도 엉망이다. 땀으로 젖어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아이를 보면 짠하기도 하고, 이미 시간도 꽤 늦어져 잔소리할 여유도 없다. 제 몸이나 잘 씻으라 하고는 세제를 부어 넣고 급속 모드로 서둘러 세탁을 시작한다. 옷이 젖는 일이야 동네 놀이터며 주변 학교 운동장 문 닫고 나오던 시절부터 경험했는데, 신발이 젖어오니 당황스러웠다.
운동 시작 초반에는 아침이 오자마자 축구화를 창가에 내어놓고 자리를 옮기며 햇볕을 따라갔다. 바삭해질 때까지. 그런데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엔 따라갈 볕이 없었다. 마르지 않은 신발은 다시 신기도 찝찝하고, 운동 컨디션에도 방해였다.
그러던 중 창고 구석에 세워둔 제습기에서 쓰지도 않던 신발 제습 버튼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제습기는 크고 무거운 데다 예쁘지 않아 주로 창고에 두었다. 장마철에나 한 번씩 창고 밖으로 나와 방이나 옷장을 말리곤 했는데, 안 예뻐도 신발을 말릴 수 있다면 이미 최애 가전 등극 임박. 축구화를 말리렴, 너의 기능과 재주를 마음껏 펼쳐보렴! 미지근한 바람이 신발을 말린다. 한 시간 남짓 강풍으로 돌리니 적당히 뽀송하다. 폭우 속에서 경기한 날이면 세 시간을 돌려야했다. 제습기의 바람이 작은 튜브로 모여서 불어 나오니 소음이 요란했지만,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작은 방에 틀어놓으면,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에 어느새 소음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이내 사라졌다.
물론 해가 쨍한 아침이면 무조건 창가로 내어놓는다. 한두 시간 만으로도 이보다 뽀송할 순 없다. 햇볕은 습기도 말리고 나쁜 것도 말려주니까 든든하다. 햇볕에 축구화를 말리는 일과는 대단한 지원을 하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일생을 거의 아파트 생활만 해서 햇볕과 빨래를 연결하는 건 드라마 속 장면일 뿐이었는데, 아이의 축구화 덕분에 창가로 바짝 다가온 볕을 알아보고 반기는 사람이 되었다.
전지훈련을 갈 때는 제습기를 끌고 갈 수 없으므로 휴대용 신발 건조기를 구입했다. 열판이 들어있는 타원형의 기기를 양쪽 신발에 끼우고, 따뜻해진 기기의 열감으로 신발을 말린다. 온도가 계속 오르는 것 같지 않으나, 밤새도록 플러그를 꽂아두기는 불안해 타이머를 옆에 두고 사용하라 했더니, 전지훈련 가서 딱 한 번 사용했다고. 집에서는 거의 사용을 안 하지만, 비상시를 대비해 잘 보관하고 있다.
아이의 축구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게 벗겨지고 흠집이 많아진다. 자주 밟혀서인지 신발 끈의 끝은 새로 바꾸어도 금세 나풀거린다. 비를 맞으며 경기한 날 새겨진 얼룩은 잘 지워지지도 않고. 그렇게 아이의 훈련이 고스란히 담긴 신발을 날마다 들여다보노라면 이 녀석이 정말 뭔가 하고 있구나 싶다.
신는 순간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이 드는 뽀송한 축구화를 준비해 줘야지. 어렵지 않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다.
잘 먹이고 깨끗하게 입히며, 기본적인 일과를 정성 더한 돌봄으로 이어간다. 아이의 꿈을 응원하는 나의 방식이다. 흑염소의 영양과 제습기의 열 일 덕분에 편히 간다. 아이는 그 돌봄을 먹고 입으며 살찔 틈은 없더라도, 팔다리가 제법 단단해졌다.
결국엔 스스로를 잘 돌보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