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쇼몽} 인간은 추악하고 스스로를 미화한다

by 칠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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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헤이안쿄의 다 쓰러져 가는 나생문 앞, 불량배와 나무꾼 그리고 승려가 한 자리에 만나게 된다. 나무꾼은 "전혀 모르겠어"라는 영문 모를 말 만을 반복한다. 불량배가 연유를 물어보지만 나무꾼은 대답하지 않는다. 승려는 오늘 나무꾼과 어떤 살인사건의 참고인으로 관아에 불려갔는데, 그 사건이 너무나 기묘하여 세상 이치에 통달한 본인 역시도 알 길이 없었다는 말을 한다. 불량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불을 피우려는데, 나무꾼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해 줄테니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3일 전 나무꾼은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나무에 걸린 여성의 챙이 넓은 모자를 보게 된다.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 보니 사무라이의 모자가 떨어져 있었고, 근처에는 밧줄과 붉은 부적 주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인근 덤불 속에는 사무라이의 싸늘한 시체가 놓여 있었다. 못 볼 것을 본 나무꾼은 그 자리에서 달아났고 3일 뒤 관아로 불려온 나무꾼은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진술했다. 관리는 나무꾼에게 혹시 칼 같은 것이 있었냐고 물어보았고, 나무꾼은 없다고 답했다.


승려 역시 관아로 불려왔는데 그는 세키야마에서 야마시마로 가는 길에 사무라이가 어느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즉 승려는 사무라이가 죽기 전 사무라이를 만났다는 것. 그렇다면 승려가 범인인 걸까?놀랍게도 범인은 제3의 인물로 다조마루라고 하는 도적이었다.


다조마루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 진실을 말해주겠다며 그날의 일을 진술했다. 다조마루는 3일 전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말을 탄 여인과 사무라이가 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다조마루는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를 아내로 삼고 싶었고 사무라이에게서 여자를 빼앗으려 했다. 다조마루는 사무라이에게 접근해 자신의 고려검을 보여주며 이와 같은 검과 거울을 고분에서 찾아 묻어두었다며 그것들이 묻힌 곳을 알려줄테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사무라이는 다조마루를 따라갔고 다조마루는 뒤에서 기습을 가해 사무라이를 나무에 꽁꽁 묶어 뒀다. 그러고는 여인에게 가서 남편이 뱀에게 물렸다는 거짓말을 한 뒤 여인을 사무라이 앞에서 겁탈했다. 이후 여인은 이렇게 된 거 결투에서 이긴 자를 남편으로 삼겠다 말했고 다조마루는 사무라이와 싸워 이겼다. 다조마루가 여인을 데려가려고 보니 여인은 온데 간데 없었다.


하지만 여인의 말은 달랐다. 여인은 다조마루에게 겁탈 당한 뒤 사무라이의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사무라이에게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이후 여인은 단도를 사무라이에게 건내며 순결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으나 사무라이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여인은 망연자실 하여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자신의 단도가 사무라이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을 느꼈다. 여인은 목숨을 끊으려 연못에 몸을 던지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관아에서는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무당을 시켜 죽은 사무라이의 원혼을 불러냈다. 그 원혼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다조마루는 여인을 겁탈 한 뒤 여인을 유혹했다. 유혹에 넘어간 여인은 다조마루에게 사무라이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순간 다조마루는 정나미가 떨어져 사무라이에게 "이 여자를 어떻게 해 줄 까? 죽일까?"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사무라이는 그런 다조마루를 용서하기로 했다. 다조마루는 도망가는 여인을 쫓았으나 추격에 실패했고, 사무라이에게 돌아와 묶인 그를 풀어줬다. 사무라이는 현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도로 본인의 가슴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이후 사무라이는 자신에게서 단도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보면 알겠지만 세 사람의 진술에는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다조마루의 진술을 살펴보자. 그는 사무라이의 여인이 싸워서 이긴 자를 남편으로 삼겠다 말했고 사무라이와 결투해서 멋지게 이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대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스톡홀름 증후군도 아니고 강간 피해자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건 무언가 이상하다. 또한 다조마루의 행동거지를 보면 전형적인 입만 산 허세남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로 볼 때 정말로 사무라이와 결투를 해서 멋지게 이겼는지가 굉장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건 여인의 진술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정신을 잃었는데 단도가 사무라이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이 무언가 이상하다. 그리고 진짜 이상한 건 따로 있는데 여인은 연못에 몸을 던지는 등의 다양한 자살기도를 했으나 실패했다고 말했다. 만약 자살기도를 했으면 몸이 성치 않아야 한다. 그런데 자살기도를 한 것 치고는 몸과 옷 주변이 깨끗하다.


사무라이의 말 역시 무언가 이상한데 아내를 유혹하고 겁탈한 다조마루를 고작 "이 여자를 어떻게 해 줄 까? 죽일까?"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용서했다는 것이 수상함을 자아낸다. 이 사단의 발단은 다조마루인데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괴감을 느끼고 자살을 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 보통 사람 같으면, 특히 사무라이라면 다조마루와 여인에게 복수를 하려 했을 거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나무꾼은 진실을 말해준다. 사실 나무꾼은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눈앞에서 보았던 목격자였다. 그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사건 현장에 떨어져 있었던 단도를 주워다 팔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점유이탈물횡령죄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무꾼이 말하는 진실은 다음과 같다. 다조마루는 여인에게 본인의 아내가 되어달라고 애원했다. 여인은 사무라이의 밧줄을 풀어줬고 다조마루는 남자들끼리 알아서 결정하라는 거냐며 알았다고 답한다. 이는 다조마루의 진술과 완전히 다른데, 다조마루의 진술에서 여인은 다조마루에게 매달리며 결투에서 승리한 자를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여자는 울기만 했을 뿐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이때 사무라이는 본인은 순결을 더럽힌 여자를 위해 싸울 생각이 없다며 원하면 여인을 가지라고 말한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저 여자를 잃는 건 말을 잃는 것만 못하다는 말 까지 해버린다. 한마디로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강간 피해자 면전에서 해버린 것. 다조마루 역시 여인을 버린 채, 제 갈 길을 가려 하자 여인은 그러고도 너희들이 사내 대장부냐며 이간질을 한다. 그렇게 다조마루와 사무라이는 꼴 사나운 개싸움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다조마루가 사무라이를 결투에서 이기고 그를 죽였다. 다조마루는 여인에게 다가갔으나 여인은 도망쳤고 다조마루는 여인을 놓쳤다.


그렇다면 다조마루, 여인, 사무라이는 왜 거짓말을 한 걸까? 다조마루는 결투에서 이긴 자를 따라가겠다는 여인의 말을 듣고 사무라이와 결투해 멋지게 이겼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여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는 사실과 달리 여인에게 눈물 콧물까지 짜며 빌었으며, 그가 주장하는 멋들어진 결투는 보기 민망한 개싸움이었다. 즉 그는 스스로를 꼴 사납고 찌질한 강간범이 아닌 한 여인의 동의 아래에 정정당당한 결투를 하여 이긴 멋진 사나이로 미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미화를 한 사람은 다조마루 뿐 만이 아니었다. 여인은 강간을 당한 걸로도 모자라 남편의 차가운 시선에 정신이 혼미해져 남편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였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조마루와 사무라이를 이간질 시켜 사태를 악화시킨 장본인이었다. 더욱이 시대를 고려 할 때 두 남자를 이간질 시켜 한 남자를 죽게 만든 것은 당시 정서에 반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여인은 사태를 악화시킨 장본인이 아닌 일방적인 피해자임과 동시에 심신미약을 주장한 것이다.


스스로를 미화를 한 건 사무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내에게 배신당했고 자괴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아내를 배신한건 도리어 사무라이였고 그는 다조마루와 개싸움을 하다 죽었다. 한마디로 그는 아내를 배신하고 한심하게 죽은 사무라이가 아닌,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정신이 무너진 상황속에서 끝까지 무사도 정신을 지키고 죽은 사나이로 스스로를 미화한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불량배는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무꾼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나무꾼 역시 본인의 죄를 감추기 위해 거짓진술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때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불량배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갓난아기가 버려져 있었다. 불량배는 아기를 감싸고 있는 옷가지를 훔치고 나무꾼이 그걸 제지하자 불량배는 거짓말 한 주제에 나한테 뭔 참견이냐 말하며 자리를 벗어난다. 승려는 우는 아기를 달래고, 나무꾼은 아기를 달라고 말한다. 승려는 이 어린 애에게 무슨 짓을 할 거냐며 말하지만, 나무꾼은 내 집에 있는 애만 여섯 이라며 하나 더 둔다 할 지언정 본인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승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아기를 안은 채 나생문을 빠져나가는 나무꾼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꾼의 말을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나무꾼의 말에도 모순이 있다. 일단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인을 차지하려던 타조마루가 자리를 뜨려고 했던 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이상한 점은 여인의 단 몇 마디에 두 사람이 결투를 벌였다는 점이다. 이 역시 앞뒤가 맞지 않다. 그리고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은 본인이 자살함과 동시에 누군가가 본인의 가슴에서 단도를 뽑아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는 마냥 거짓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이 진술은 사무라이에게 있어서 불리한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말이 사실이라면 사무라이의 가슴에 박힌 단도를 뽑은 사람은 나무꾼일 확률이 높아진다. 즉 나무꾼 역시 은연중에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그리고 나무꾼은 불량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줄 테니 사실을 알려줘"라고 말했다. 이는 나무꾼이 본 것이 무엇인지 본인 역시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나무꾼이 말한 내용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나무꾼은 사건을 보고만 있던 게 아니라 사건에 개입하고 있었던건 아닐까?


나무꾼은 아기를 데려다 키우기로 마음 먹은 것 같지만 그것은 알 수 없다. 그가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것을 고려하면 어쩌면 아기를 팔아 넘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집에 아이가 여섯이나 있다는 말 역시 마냥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승려는 나무꾼을 통해 인간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나무꾼의 선해 보이는 연기에 속은 건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을 더 말하자면 자기 미화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다조마루, 여인, 사무라이는 자신을 미화하는데 실패했다는 거다. 다조마루는 자신을 여인의 동의 아래에 결투를 해서 이긴 멋진 사나이로 미화했지만 그의 진술을 보면 그는 그냥 강간범일 뿐이다. 여인은 스스로를 불쌍한 여인이자 심신미약자로 미화했지만 그녀의 진술을 보면 여인은 살인자다. 사무라이는 무사도를 지키면서 불쌍하게 죽은 사람으로 스스로를 미화했지만 그의 진술을 보면 조잡한 도적 따위에게 당해 나무에 묶이기나 했던 한심한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그 자체로 한심하고 나약하며 스스로를 미약하기 위해 애쓰는 추악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꼴사납고 우스운지도 모른 채 말이다. 도무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영화, 라쇼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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