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재판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는 법관의 주관적 추측이 아닌 반드시 법률적 자격을 갖춘 객관적인 증거에 한해서만 범죄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무죄 추정의 원칙과도 일맥상통한다. 피고인이 무죄라는 것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객관적인 법적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피고인을 무죄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이 두 개는 형사재판에서 가장 기초적인 원칙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장 기초적인 두 가지 원칙이 깨진 재판이 있다면 믿어지겠는가? 오늘 리뷰할 영화는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부러진 화살이다.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경호는 학교에서 출제한 대학 입학시험의 오류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만다. 경호는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걸지만 당시 담당 판사는 하필 대학 측과 친분이 있었고 경호는 패소하고 만다. 불공정한 판결에 부당함을 느낀 경호는 선을 넘게 되고 석궁을 들고 담당 판사였던 봉주를 찾아가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자백하라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봉주는 상해를 입어 병원으로 이송되고, 경호는 체포된다.
그렇게 1심이 열리게 되는데, 이 사건 무언가 이상하다. 증인으로 참석한 봉주는 자신이 화살을 맞자 경비원과 운전기사가 달려와 경호를 제지했고, 본인이 화살을 뽑자 화살이 부러졌다는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닌가?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진술인데 더 이상한 것은 부러진 화살조차 없다는 거다. 경호는 거짓말을 하는 거냐며 봉주를 추궁하고, 그와 동시에 지난번 교수지위 확인 소송에서 법에 의해 재판해야 한다는 헌법 집행 3조와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민사소송법 제1조를 위반한 봉주의 만행을 폭로한다.
담당 판사인 성오는 현재 사건과 무관한 일을 언급하지 말라며 경호를 제지하지만 경호는 도리어 본인이 봉주를 찾아간 동기를 말하는 거라며 본인의 논리를 확고히 한다. 하지만 성오는 사건을 따져보기는커녕 경호를 범인으로 단정 지으려 하고, 이를 눈치챈 경호는 재판을 거부함과 동시에 변호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변호사를 해임시킨다.
한편 경호의 처는 변호사를 알아보던 중, 친한 친구인 장은서 기자로부터 박준이라는 변호사를 소개받는다. 박준은 경호를 만나는데 이 두 사람 말이 너무 안 통한다. 박준은 경호의 변호를 포기하려고 하나, 사건에 대한 미심쩍음과 계속 쌓여만 가는 사무실 빚 해결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가 겹쳐 경호를 변호하기로 한다. 박준은 경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그가 봉주를 살해 혹은 상해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그저 겁만 줄 의도였음을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항소심이 열리고 이태우 판사가 본 재판에 배정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재판 시작부터 이상하다. 박준은 1심의 증인이었던 봉주를 증인으로 다시 신청하지만 태우는 이를 기각한다. 사건의 중요 증인을 기각하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 박준은 검사 측에서 증거로 제출한 옷가지에 대한 혈흔 검증을 요청한다. 즉, 증거물로 제출된 옷가지의 피가 봉주의 피인지 확인해 보자는 것. 하지만 태우는 1심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야 이를 언급하는 거냐며 도리어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것만 봐도 매우 이상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상함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고승민 구급대원은 봉주가 구급차 안에서 화살이 배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고 말한 것을 진술한다. 그런데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겠지만 1심에서 봉주는 본인이 직접 화살을 뽑았다고 증언했다. 이상한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또 다른 증인인 봉주의 담당의사는 상처의 길이가 2cm였다 주장한다. 그런데 구급대원의 진단서는 0.5cm다. 이어서 경찰 측의 증언이 이어지는데, 본인이 증거로 회수한 화살 중에 부러진 화살은 없다고 진술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러닝과 조끼에는 혈흔이 묻었는데 와이셔츠에는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박준은 증인으로 참석한 담당 형사를 추궁하지만 형사는 과학적인 거라 설명하기 어렵다는 초등학생도 속지 않을 말을 한다. 태우는 검사 측에게 반대심문을 요구하는데, 검사는 이를 넘겨버린다.
앞뒤가 맞지 않는 봉주의 진술, 엇갈리는 진단서, 부러진 화살의 부재, 와이셔츠에만 없는 혈흔, 그리고 유죄 입증의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검사, 이 정도면 무죄를 받을 법도 한데, 태우는 무죄를 선고하기는커녕 재판을 연기하는 걸로도 모자라 혈흔 감정과 박봉주 증인 신청을 기각해 버린다. 호송차에 오르는 경호에게 기자들이 달려들고, 이번 재판이 어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경호는 불후의 명대사를 날린다.
"본 대로입니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사법부에서는 경호와 박준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고 보수 중에서도 알아주는 꼴통인 신재열 판사에게 항소심을 맡긴다. 재판이 열리자 박준은 박봉주의 혈흔 감정을 요청하나 항소심은 1심의 범위 안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를 기각시킨다. 그야말로 증거재판주의의 기본조차 어기는 상황 속에서 경호는 경찰 측에서 제시한 진술서중 "피의자가 석궁과 화살을 임의로 제출했다"는 내용을 반박하며 "난 석궁과 화살을 빼앗겼지 제출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판사는 비리를 고발할 의무가 있다며 경찰들을 허위 공문서 작성죄로 고발하라고 지시한다. 재열은 코웃음을 치며 이를 무시하려는데, 경호는 한술 더 떠서 면전에 있는 검사에게 신재열 판사를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해 버린다. 이어서 경호는 와이셔츠에서의 혈흔 미검출, 부러진 화살에 대한 석명권 행사를 요구하지만 재열은 이를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권위로 어떻게든 찍어 누르긴 했지만 재판을 진행해야 할 판사가 도리어 피고인인 경호한테 놀아나는 일이 발생하자 사법부는 경호를 꺾기 위해 그를 악질 죄수들만 모아 놓은 감방으로 이감시키고 이로 인해 경호는 패인이 된다. 한편 박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석궁의 위력을 실험해 보는데 그 위력은 돼지고기에 15cm나 박히는 위력이었다. 거기다 불완전한 장전으로는 발사조차 되지 않았다. 박준은 은서와 함께 사건현장으로 가서 직접 사건을 재현하고 봉주의 증언이 허위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를 영상으로 찍는다. 다시 열린 재판에서 박준은 석궁 실험을 담당한 경사를 증인으로 세우고, 봉주의 증언이 허위임을 입증하는 동시에 재현 영상을 증거자료로 제출하려 하지만 재열은 이를 모두 기각한다. 박준은 최후의 수단으로 재현 영상을 언론에 제출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만다.
한편 미국에 있던 아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경호는 다시 용기를 내어 법정에 서게 된다. 그렇게 열린 항소심 마지막 공판에서 박준은 재판 녹음을 신청하지만 재열은 형사소송규칙을 들먹이며 이를 기각한다. 규칙은 형사소송법 보다 아래에 있다는 박준의 반박에도 말이다. 이에 분개한 한 시민이 항의하자 재열은 이름 모를 시민을 강제 퇴정시킨다. 경호는 이에 분노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판사남, 이게 재판입니까? 이건 독재입니다."
경호는 재판을 다시 한번 기피하고, 박준 역시 자진해서 퇴정 한다. 재열은 어떻게든 재판을 속행하기 위해 국선 변호인을 경호에게 붙이려고 하고 박준은 다시 법정 안으로 들어가 경호의 변호를 시작한다. 박준은 검사 측에 대한 석명을 요청하고, 재열은 매우 무성의한 태도로 석명을 하도록 한다. 근데 검사 측의 해명이 매우 가관이다. "석궁과 화살은 피고인이 임의로 제출한 것이 아니다. 부러진 화살이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왜 와이셔츠에 피가 안 묻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경찰 측의 제시한 진술이 허위이고 경호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재열은 이를 얼랑 뚱땅 넘기려 한다.
박준은 다시 한번 박봉주를 증인으로 내세울 것과 혈흔 감정을 요청하지만 재열은 이미 기각했기에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늘어놓는다. 거기에 더해 재열은 같잖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체 피고인이 공소 사실에서 인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면서 상해할 고의가 없었냐는 도돌이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박준은 애초에 상해를 하지 않았기에 고의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반론을 제시하지만 재열은 그야말로 답정너적인 태도로 박봉주의 집에 활을 들고 찾아간 것을 인정하는지를 묻는다. 박준은 그건 인정하고 잘못한 일이지만 박봉주가 석궁에 맞은 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재반박하나 재열은 옷에 난 구멍과 혈흔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무한루프를 시전 한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박준은 그걸 알아보자고 혈흔 감정을 신청한 건데, 그걸 기각시켜 놓고 왜 자기한테 따지 나며 재열에게 반문한다. 하지만 재열은 판사로서의 권위를 이용해 사건을 어물쩍 종결시키려 하고, 그야말로 경호의 유죄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박준은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재판장님은 100여 년 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간 드레퓌스 사건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시 재판부는 진범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한 채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죠. 그런데 100년도 더 지난 21세기 대한민국 사법부에서는 이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억지 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피고인의 행위를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온 국민에게 공표를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 이거 대체 누가 한 겁니까? 바로 사법부입니다. 신재열 재판장님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결국 경호는 유죄를 선고받게 되고 대법원에 상고하지만 끝내 교도소로 보내지게 된다. 호송차에서 내린 경호는 죄수들을 상대로 얼차려를 시전 하는 교도관들을 자신의 손바닥에 적으며 이를 고발할 거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것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참고로 이 영화의 상당수가 실화다. 부러진 화살은 발견되지 않았고, 현장에서 발견된 화살에서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1심에서 증인으로 참석한 판사는 항소심에서는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와이셔츠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과 옷에서 발견된 혈흔이 판사의 것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지 않은 것 역시 실화라는 거다.
한때 이 영화는 가해자를 미화한 영화라는 비판을 들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석궁을 들고 판사를 위협한 것은 엄연히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해자의 행동을 옹호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실제 영화에서도 박준은 석궁을 들고 판사를 위협한 행위가 잘못한 일이라 말한다. 이게 대체 어떻게 가해자 미화란 말인가?
그리고 나무위키에서는 "내가 적어도 폭행범이라고 지적한다면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폭행에 대한 증거가 재판에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 현실에서 내가 폭행범이어도, 재판에 제시된 증거만으로 판결해야 하는 게 판사이므로 제시된 증거만 따져보면 난 무죄인데, 충분한 증거 없이 유죄를 선고받았으므로 억울하다"라는 것이 실제 교수의 논리라며 본 영화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 말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앞뒤가 맞지 않다. 일단 자백만으로는 유죄 입증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재판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진행되며 무죄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피고인은 무죄인 것이 재판의 대원칙이다. 그러므로 이는 본 영화를 비판할 만한 논거가 되지 못한다.
그날 재판에서는 혈흔 검증도 없었고, 중요 증인 신청 역시 기각되었으며, 발견되지 않은 부러진 화살, 와이셔츠에서 발견되지 않은 혈흔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그것도 한 사람의 유죄를 마치 미리 정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재판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법적인 논거에 따라 가리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그날의 재판은 법적인 논거에 따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자리가 아닌,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아무런 법적 증거도 없이 죄인으로 내모는 자리였다. 형사소송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까지 무시하면서 말이다. 그날 부러진 것은 화살이 아니었다. 그날 부러진 것은 한 인간의 인권과 대한민국의 법치주의였다.
한 사람의 인권과 법치주의가 부러진 사건을 조명하는 동시에, 대한민국 사법부의 민낯에 일침을 던지는 작품, 부러진 화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