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구기며 인상을 찡그리고 짜증을 억누르는 투의 말이, 무해함을 뒤집어쓴 모습의 허점을 정확히 눌렀다.
“……예?”
당황해 되묻자, 상대방이 옅게 비웃었다.
“모를 줄 알았어요? 연구소 앞에서 보안요원한테 명함 내밀었으면 이 정도는 예상하셨어야죠.”
자리가 자리인지라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말끝은 서서히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었다.
“다시는 이딴 식으로…….”
고조되는 목소리, 점차 강하게 실리는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칼 끝에 찔리기 직전, 6시가 지났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출입이 통제되고, 7시까지 퇴장하라는 내용이었다.
“… 나가세요.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고요. 지긋지긋해.”
끊겨버린 분노를 이어갈 생각이 없는지, 상대방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행보가 걸릴 순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은 예상하지 못했다. 허를 찔려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뒤를 도는 모습을 지켜봤다.
안돼, 안된다. 이렇게 기회를 날릴 순 없어. 멀어지는 발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봉안당에서는 뛰어선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곧장 달려갔다.
“잠깐, 잠깐만요. 메일을 받았어요. 메일!”
상대방의 앞을 가로막고 휴대폰을 곧장 꺼내 지문인식을 시도했다. 손에 쥔 땀으로 인해 잠금은 풀리지 않았고, 다급하게 옷에 손을 닦아내며 메일함을 열었다.
“소프트코어 공식 메일이요. 언네임드! 언네임드를 아세요?”
패를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알 수 없게 돼버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공기계고 VPN이고 나발이고, 떨리는 손으로 엉뚱한 곳을 눌러대며 겨우 언네임드의 메일을 열었다.
“제, 제게 질문이 왔어요. 그, 열쇠가 필요하다는데, 이것 때문에 온 거예요.”
화면을 보여주자, 상대방이 약간의 짜증과 당혹스러움의 눈빛으로 메일 내용을 읽어 내렸다.
“심장이 필요한 이유와 열쇠요…….”
상대방은 잠시동안 침묵에 잠겼다. 메일의 내용은 짧았지만,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나중에 연락드리도록 하죠.”
누그러진 목소리로, 어쩌면 전의를 잃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공허하게 말을 마치고 아까보다 느려진 발걸음으로 봉안당을 떠났다.
“하 씨이발…… 명함을 하나 더 파야 했나?”
나중에 준다는 연락은 긍정일지, 부정일지 알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패가 다 까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점점 더 잦은 빈도로 울리고 있는 커뮤니티 알림을 외면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
“아으으…….”
홈 스윗 홈. 나의 사랑스러운 침대. 드디어 다시 만나는구나.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씻지도 않고 외출복 그대로 침대 위에 다이빙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깊고 진한 자괴감과 함께 하루를 곱씹었다.
가지고 있는 이동 수단이라곤 딸배들이나 탈 법한 무난한 오토바이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속버스표를 샀다. 닭장처럼 비좁아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틈도 없는 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고, 새벽부터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몸빵을 뛰었다. 내가 좀 똑똑했다면야 덜 돌아다녔겠다만, 어쩌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저렇게 살진 말아야지”라고 말하는 “저”가 바로 난데.
하여튼 자기 연민은 각설하고, 소프트코어의 연구소 앞에서 보안요원을 만난 게 대략 오전 10시 정도쯤이니 그 이후부터의 행적이 의문의 여성에게 들어갔다 생각하면 되겠다. 어쩌면 그 이전의 행적까지도 말이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보안요원이 연구소 주변을 도는 침입자에 대해서 보고하고, 동네 주민들에게서 낯선 사람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받는 사람? 심히 대단한 여자? 하기사, 내가 멍청이처럼 굴긴 했다만, 기가 세다고 해야 하나. 평소에는 그렇게 멍청한 티를 내지 않는데, 그 여자 기에 눌려서 그런 거지…. 관리도 잘했는지 얼굴에서 광이 나더라. 그냥 온몸에서 나 부자요, 하는 게 티가 났다. 그 자체로 완전한 그녀는 나랑 절대 마주칠 일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어쨌든 최웅이랑 뭔가 있다는 건데.”
연구소 정보는 철저히 암호화되어있어서, 연구소의 설립자인 공학자 최웅의 이름 말고는 거의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이마저도 심장을 로봇 팔에 기증했다는 이야기에 겨우 공개된 정보였다. 그러니 인터넷에는 이상한 찌라시만 도는 것뿐이고 그 어느 것도 증명된 말이 없었다. 오늘 만난 여자도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을 터…
“아니지, 아니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다니? 오늘 보지 않았는가. 관리를 잘하고, 부내 나고, 침입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고, 최웅과 연관 있고.
“연구소 등기부등본을 떼보자.”
침입자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는다는 건 그 근방에 커넥션이 있다는 뜻이고, 최웅과 연관이 있으면서 부자라면 분명 거기서부터 알아보면 되는 거다. 인터넷에서 최웅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연구소나 본사 건물주는 다른 사람일 거고, 본사 건물은 서울이니 전세일지도 모른다. 분명 연구소 건물의 주인부터 파묘해 보면, 뭐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았다.
“에이 씹….”
침대에 누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몸을 일으켜야 하냐. 발바닥은 욱신거렸고, 종아리는 퉁퉁 부어있었다. 닭장 버스의 여파로 뒷목도 허리도 욱신거렸다. 멀쩡한 구석이 하나 없었다. 그 여자는 이렇게 안 살겠지. 울어도 람보르기니, 페라리 운전대 잡고 명품 가방 던지면서 울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대로의 발버둥을 쳐야 한다. 더럽고 치사해도, 밥은 먹고살아야지. 내 나름대로 잘 살아야지.
봉안당에서 느꼈던 죄책감이 가시고 관성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게 내 자리다.
[아 유서 ㅈㄴ 궁금한데 언제 올림?]
[이분 돌아가셨답니다 글 내려주세요.]
ㄴ[닌 진짜 악마새끼다ㅋㅋㅋㅋ]
ㄴ[그거 어원 알고 쓰는 거임? 댓글 지워라]
이곳이 정녕 내가 있었던 자리인가. 고무줄을 당겼다가 놓으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세하게 늘어나버린 길이는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바라보는 댓글 창이 미묘한 감상을 일으킨다. 내가 과연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게 맞나? 앞으로도 여기를 내 자리로 여길 수 있을까? 텅 빈 목함의 자리가 떠오르자 기묘한 불안감이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