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by 한서

귀에 익은 목소리에 맥이 풀렸다. 쫑긋 묶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깔끔한 정장 위로 익숙한 후드집업을 입고 있는 민재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비닐봉지 하나를 달랑거리며 다가왔다.


“언제 훔쳐 갔냐?”
“작년 이맘때쯤? 빌렸다가 깜빡했는데 옷장 정리하다 찾았어.”
“변호사가 도둑질을 다 하네.”
“빌렸다고 임마. 니가 빌려줬다고.”


민재가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며 옆에 다가와 앉았다.


“히익? 뭔 담배를 이만치 태웠어? 끊는다고 액상으로 바꾼 거 아녔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위해서 놔둔 재떨이. 이상하게도 여기 빌라에는 담배를 태우는 인간이 나밖에 없어서 내 전용이 되었다. 고슴도치처럼 수북해진 재떨이를 보며 민재가 놀라서 담뱃갑을 뺏었다.


“야 그거 돛대야.”
“어쩔.”


마지막 남은 담배가 민재의 입에 홀라당 올라갔다. 시원하게 타들어 가는 마지막 담배를 보고 아까워서 입맛을 다셨다.


“왜 왔어?”
“회사 근처에 야장집들이 좀 있거든? 이번에 새로 뚫은 곳 막창이 기가 막혀서 말야.”


손목에 걸려있던 비닐봉지를 빼서 내 무릎 위에 툭 올려뒀다. 아직 따끈했다.


“말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으면 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집 안에 누워있을 맹유별을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낮에 통화했잖아. 그게 그거지 뭐.”


민재가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며 여상하게 말했다. 하기사, 언제부터 민재가 집에 오는 걸 가렸다고 그렇게 말하겠나. 그래도 미리 알았으면 맹유별을 집에 들이지 않았을 텐데 싶긴 했다만, 맹유별이 집에 들어오게 된 것도 필연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집에 손님 있어.”


텅 빈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돛대였는데, 아쉬워서 그런 걸까.


“손님 받을 꼬라지가 아닐 텐데 거기.”
“야 나름 깨끗한 거야.”
“웩.”


민재가 다 피고 남은 꽁초를 탈탈 털어 재떨이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잠깐 편의점이나 가자.”
“그래, 그러던가.”


집에서 잠들어 있을 맹유별을 생각해 보면 10분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가서 담배나 사 와야겠다.

***

“어어? 나 금방 들어가야 하는데?”


편의점 앞 야장에 빈자리 하나가 있었다. 민재는 자리 뺏긴다며 플라스틱 의자에 날 강제로 앉혀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항의는 소용없었다.
차양 끝에는 주황색 등이 밝게 빛나고 있었고, 날벌레 퇴치용 모기등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빛이 강해서 그런지 빛이 닿지 않는 공간은 시꺼멓게 분리된 것처럼 보였다.


“어. 받아.”


딸랑이는 종소리보다 민재의 목소리가 먼저 귀에 꽂혔다. 민재는 장바구니 무겁게 술을 채워왔고, 각종 과자가 술 사이사이에 꽂혀있었다.


“담배는?”
“끊어 임마.”


인간적으로 돛대 뺏었으면 사 왔어야지. 드럽게 치사하네. 툴툴거리며 맥주 한 캔을 땄다. 탄산의 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왔다. 단숨에 들이키며 절반가량을 마시자 속이 시려왔다.


“크으~”
“그래서, 뭐 한다고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워?”


민재가 막창을 담은 스티로폼 용기에서 고무줄을 빼며 물었다.


“그냥 필 때 돼서 나온 거지 뭘.”
“그러냐.”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민재도 맥주를 땄다. 탕 하는 소리가 마치 총성처럼 우렁차게 들려왔다.


“유재야.”


민재는 조용히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난 네가 참 좋아.”
“미쳤나. 어디서 먼저 마시고 왔어?”


소름 돋는 소리에 팔을 문질렀다. 이걸 오글거린다고 해야 할까? 민재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말이었다. 쑥스러운 건지 낯선 건지 모를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그래서 그냥 오래 보면 좋겠다.”


민재는 내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일하다 보면 그렇더라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것 같아. 세상에 짐승 새끼들이 너무 많아.”


민재는 말을 마치고 손에 쥐고 있는 맥주를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난 그래서 너랑 만나는 게 좋아. 그나마 숨통이 트여. 그러니까 내가 널 믿는 만큼, 너도 날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나 혼자 지레 찔려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민재는 내 상황에 대해서 모르고 말하는 걸 텐데 어쩐지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 짐승 새끼가 나인 것 같아서.


“뭘, 뭘 믿는데. 너도 알잖아 나 이렇게 한심하게 사는 거.”


실체 없는 믿음이 너무 무거웠다. 차가운 맥주 캔 겉면에 붙은 물방울은 점점 불어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테이블이 젖어 들어갔다.


“니 인생 니가 사는 건데 뭘.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민재는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일 텐데, 그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듯 말이다.


“세상에 나쁘지 않은 사람이 하나 없더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겠지. 근데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더라고.”


민재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우리에게서 믿고 싶은 건 네가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한 게 아니야. 그냥, 인간성을 믿고 싶은 거지.”


그렇게 말하며 캔에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인간성, 인간성…. 생각 없이 살았던 것을 보복이라도 하는 듯 온갖 무거운 단어들이 눌러왔다. 죄악도, 속죄도, 사랑도. 도대체 인간성이란 또 무어란 말인가. 이쯤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인생을 머저리마냥 살았구나 싶었다.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공감을 잃고 사랑을 잃고, 결국 도리를 잃었나?


“그래서… 내가 널 믿는 것만큼 너도 날 믿어줬으면 좋겠다 싶었어. 내가 날 믿기 어려운 세상이라.”


민재는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다. 민재가 원하는 일은 내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민재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었으니까. 말로 내뱉기 어렵고 쑥스러워서 그런 말을 해본 적 없지만, 언제나 그저 믿었다. 내게 남은 인간성이 믿음인 걸까?


“……어렵네.”


침묵으로 도망칠 수 없어서 겨우 입을 열었다. 한심한 소리였지만 민재는 그 말에 웃었다.


“그러게. 어려워. 인생이 진짜 존나 어렵다.”


그 말에 공감하며 쓰게 웃었다. 도대체 왜 인생은 두 음절일까. 그 안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한가득인데. 복잡한 추상을 한데 모아서 인생으로 퉁치면, 그 안에서 내게 맞는 삶을 찾아 꺼내야 하는 걸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고 있었을까.


“몰라. 그래도 일단 사는 거지.”


민재는 내 속을 읽은 듯이 말하며 손에 묻은 과자 가루를 탁탁 털고 자리를 정리했다.


“뭐, 벌써 가?”
“집에 손님 있다며 새꺄.”


아쉬운 마음에 붙잡았다가 들은 핀잔에 입을 다셨다. 맞지, 집에 맹유별이 있지. 책임져야 할 일이 있지.


“밥 잘 챙겨 먹고. 담배 작작 피우고. 사고 치지 말고.”


막창을 담아왔던 봉투에 남은 술과 안주들을 정리하고 내 앞에 둔 뒤 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나.”


피식 웃으며 그 말을 돌려주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다.”
“어. 멀리 안 간다.”


민재는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길 속으로 척척 걸어 나갔다. 돌려주겠다고 입고 와서 도로 가져가는 모습이 우스워서, 저도 모르게 “하하!” 소리 내 웃어버렸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플라스틱 의자에서 벗어나 골목길을 걸어보니 알겠다. 이곳은 새까맣지 않았고, 하늘에 떠 있는 모든 것이 눈에 촘촘히 박혔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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