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만화는 <빨간 머리 앤>이다. 만화시작 전부터 나는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에 서둘러 앉는다. 오프닝 노래가 흐른다. 실로폰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더니, 눈송이처럼 생긴 수 만개 벚꽃이 찬란하게 흩날린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벚꽃의 향연을 볼 때 삐딱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앤이 살고 있는 에이번리 마을 풍경에 빠져든다. 검은색 머리,예쁘게 생기지 않은 나도 앤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고 싶었다.
나는 내성적이고, 다소 소심했고 엉뚱한 면이 있었다. 부모님은 먹고살기 바빠서 내가 어떤 아이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관심 갖지 못했다. 꼴등에 가까운 성적표를 가져와도 나무라거나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내게 관심을 갖는 일은 단출한 반찬 도시락과 용돈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학원비하라고 받은 돈으로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고, 카세트테이프와 편지지를 사기도 했다. 용돈 5백 원, 천 원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물건들이 방 한가득 차는 이유를 부모님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시절 어린 눈에 담임 선생님은 유독 공부를 잘하는 아이에게는 상냥한 말투와 관대함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은 아이였다. 아니, 무언갈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어느 날 수업시간 공부는 하지 않고, 창밖 세상에 더 관심이 갔던 나는 그제야 선생님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나는 공부에 관심 없는 심각한 꼴통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 내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주저 없이 '선생님'이라고 답했다. 스스로 공부머리는 아닌 걸 인정하면서도, 이유 없이 선생님이 되면 좋을 것 같았다. 만일 내가 진짜 선생님이 된다면,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아이들에게 평등하게 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우리 부모님처럼성인이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릴 적 꿈이었던 선생님은 노력의 부재로 인해 영원한 불멸의 꿈으로 남게 되었지만,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비밀무기가 하나 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나는 빨간 머리 앤을 사랑한다는 것. 어릴 적에는 빨간 머리 앤의 엉뚱하고 짓궂은 모습이 좋았다면, 어른이 된 지금은 시절의 풍경과 그녀의 언어를 사랑한다. 그래서일까. 완연한 봄이 찾아오기 전, 겨울의 끄트머리즈음이면 어김없이 <빨간 머리 앤>의 얼굴이 떠오른다.
꽃피는 봄보다 봄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이 더 애틋하고 간절하다. 마치 시골에 사는 노부모가 도시에 사는 자식이 시골에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거나, 젊디 젊은 총각이 약속장소에서 만날 예쁜 처녀를 기다리는 일, 저녁밥을 해놓고 남편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 등 우리 일상에는 의식하지 않은 어여쁜 기다림이 가득하다. 내가 지금보다 행복해질 거라는 상상이 동반된 기다림은 아무리 긴 기다림일지라도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다. 내게 '빨간 머리 앤의 봄'은 그런 존재였다. 하얀 벚꽃을 보는 일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소중했고, 설레는 일이었다. 앤을 떠올리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 주변 울타리에는 오래된 벚나무들이 수 십 그루가 있다. 아직은 앙상한 가지들이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지만, 이미 나무를 지탱하는 혈액은 심장을 거쳐 두근두근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봄이 되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앙상했던 가지에 수많은 잎사귀와 꽃 친구들이 함께한다. 그래서 나무 이름이 벚나무 일까? 벚과 벗은 의미가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발음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벚나무 꽃말: 결박, 정신의 아름다움
벗 : 사람이 늘 가까이하여 심심하거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서로 다른 뜻을 지니고 있는 '벚'과 '벗'이지만, 이 둘 단어가 내포하는 공통된 의미는 정신적인 풍요이다. 벚나무는 정신을 아름답게 하고, 벗은 함께할수록 행복한 일처럼, 이 둘은외로운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벚나무 곁에서 벗을 기다리고, 벚나무 길을 벗과 함께 걸으니 벗도 나도 행복했다네.'
이참에 문득 시인이 되어보기도 하고.
<빨간 머리 앤>이 선물해 주는 봄은, 삶은 동화요, 힘들일도 좌절할 필요도 없는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사는 세상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비록 나는 선생님이 되진 못했지만, 좋은 책을 읽고 기록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오늘도 벚꽃 피는 봄을 기다리며, 빨간 머리 앤의 초록 지붕을 닮은 식탁서재에 앉아 꿈을 위한기록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 이제 진짜 봄이 오는구나!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저는 기다리는 즐거움이 모든 즐거움의 절반은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무도 그 일을 기다리는 즐거움을 막을 수는 없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기대하는 게 없는 사람은 실망할 일도 없기 때문에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세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보다는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p.177
새해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어 세워 나의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의미 없이 지나친 순간도 그러모으면 하루를 사는 비타민이 될 거라 믿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글 쓰는 작가 여섯이 꾸려가는 공동매거진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구독하고 당신의 일상에도 영양을 듬뿍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