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등한 노동이 필수조건
2024년의 설이 밝았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며느리들이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고 음식상을 차려낸 뒤 설거지를 할까. 시대가 바뀌어 명절에 여행하는 가족도 늘었다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허리 펼 새 없는 노동을 하며 성이 다른 조상의 차례를 지내느라 고군분투하는 며느리들이 있을 것이다.
갓 새댁이 되어 한복 차려입고 시댁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내가 간 곳은 큰 아버님댁이었다. 시부모님들은 내가 남편을 만나기 전에 모두 돌아가셨지만 사촌에 육촌까지 사이가 좋던 시댁은 나름 규모가 큰 가족이었다. 우리 아버님은 사 남매 중 막내였고 나는 그 집의 막내며느리였다. 한마디로 내가 가장 어린 어른이었다.
스물일곱의 새댁은 생판 처음 가보는 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상을 차린 뒤 부엌에서 분홍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도맡았다. 회사에서는 글을 썼고, 동아리 후배들과 노래공연을 했으며, 당시 활동하던 사회운동단체에서는 사무국장을 맡아 각종 노동집회에 참석하며 구호를 외치던 내가 한복 입고 설거지를 하려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어차피 결혼하면 다 할 거니까 벌써부터 할 필요 없다"라며 일절 주방일을 돕지 못하게 했으니 말이다. 결혼한 내 친구들도 각자의 시댁 싱크대 앞에서 이러고 있으려나,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큰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큰 아버님이 큰 아들네로 옮기자, 차례는 각자 지내고 성묘 가서 만나자는 집안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때부터는 아주버님, 형님, 남편, 나 이렇게 넷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차례상을 차렸다. 형님이 각종 재료를 모두 사다 놓으셨다. 그러면 명절 하루 전에 우리 부부가 가서 준비를 도왔다.
넷 밖에 없이니 넷 다 일을 해야 했다. 누구는 음식하고 누구는 소파 위에 앉아 TV 시청만 하는 모습이 없었다. 2인 1조가 되어 형님과 나는 바닥에 신문지 깔고 가스버너로 전을 부치고 두부를 지졌다. 남자들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나물을 삶아 물기를 짜고 생선과 고기를 구웠다. 동등한 노동 뒤에 찾아오는 설거지는 큰일이 아니었다. 서로가 앞다투어 자기가 하겠다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일이 끝나면 넷이 둘러앉은 술자리가 이어졌고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함에도 밤늦도록 깔깔거리곤 했다.
명절 때마다 명절증후군이니, 며느리 파업이니 하는 기사와 글이 쏟아진다. 며느리들이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일 하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다. 일을 혼자 하다 보니 (혹은 여자들만 하다 보니) 부당하다는 생각에 화가 나는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모두가 나서면 음식장만도 빨리 끝나고 함께 쉴 수도 있는데 말이다.
가끔 내게도 시부모님들이 계셨으면 명절 때 어떤 풍경이었을까 상상한다.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나는 X세대 40대다. 요즘은 세련된 시어머니 이야기도 많이 접하지만 우리의 부모 세대를 확 바꾸는 건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며느리가 여느 집의 귀한 딸'임을 설파하고 공명정대함을 말한들 남자가 부엌일을 하지 않는 걸 평생 당연하게 여겨 온 가족 문화를 바꾸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 가치관 속에서 자란 그 집 아들들 생각 바꾸기도 마찬가지일 테고.
우리 세대부터 노력하면 좋겠다. 우리 나이도 슬슬 며느리를 보고 사위를 볼 나이가 되어간다. 아들이건 딸이건 며느리건 사위건 모두가 부모와 함께 동참하여 일할 땐 일하고 놀 땐 노는 집안 문화를 만든다면 명절증후군 같은 단어는 없어질 것이라 믿는다. 자신이 며느리 때 받은 설움을 아랫 세대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다. 어떻게든어디서든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명절 설거지를 해도 행복한 마음은 가족 간 평등한 노동이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