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이사를 했다.
이곳은 7년밖에 안된 아파트로 기존에 살던 집에 비해 많은 점이 다르다. 집안 구석구석 붙박이 장롱도 있고, 베란다가 없는 확장형이라 무척 넓다. 게다가 수납장이 많아서 지저분하게만 보였던 잡동사니를 보이지 않는 곳에 정리하기도 용이하다.
아파트로 이사 한 첫날, 내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나만의 서재였다. 나는 그럴싸한 책상이 없지만, 집에서 지내는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곳은 서재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다른 어떠한 공간보다도 나다울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글쓰기 모임에서 '나만의 글 쓰는 공간을 확보하라'는 제목을 두고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공간인 식탁서재를 소개했고, 그곳은 낭만 가득한 '초록지붕'이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그때가 벌써 21년도 3월 18일이었으니까, 식탁서재와 함께한 지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꼬물꼬물 귀여운 아가였던 아이들이 벌써 일곱 살이 되었으니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다. 변치 않는 건, 21년도나 지금이나 같은 식탁서재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며 글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출판 작가가 되었습니까?"라고 물을 당신을 위해, "그렇지는 않네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왜 책을 낸 작가만이 꾸준히 쓰는 행위를 해야 하는지, 왜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3년 동안 글을 쓰면 안 되나. 자고로 글쓰기는 실보다 득이 더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의 질문일 뿐이다.
이사를 해도 여전히 나는 식탁을 어디에 둘지 장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 집은 방이 총 네 개인데, 방 2개를 하나로 확장한 방이라 베란다 창이 두 개나 된다. 사실 그 방에서 바라보는 창밖은 온 사방이 논이라 뷰가 끝내주니 단연 식탁서재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아이의 반대에 부딪혔다. 자신들은 거실에 나와 놀면 엄마가 없기에 '무섭다'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엄마 식탁은 절! 대! 방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 마음이 갈대라는데, 아이들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안돼를 고수한다. 하는 수 없이 식탁은 식탁이라는 이름하에 주방 아일랜드 옆에 두었다. 식탁을 가로로, 혹은 세로로 놓기도 해 봤지만, 가장 좋은 위치는 주방을 바라보는 위치가 적당했다. 예전 집에서도 나는 주방을 배경 삼아 글을 썼다. 덕분에 다른 어떠한 공간보다 주방이 지저분한 걸 싫어한다. 온갖 설거지와 싱크대 위에 난잡한 물건이 놓이는 걸 싫어하는 이유도 내가 주방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일요일에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갔다. 그곳에는 근처 화훼농장에서 기른 꽃을 직거래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데, 이날은 독특하게 생긴 라넌큘러스를 7천 원에 가져올 수 있었다. 식탁에 생화를 두니 어느 순간 생기가 도는 걸 느낀다.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있어서 화병을 엎지를 수도 있는데, 특이하게도 우리 아이들은 엄마의 식탁서재에서 단 한 번도 말썽을 피운 적이 없다. 하다못해 책이나 노트에 낙서를 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엄마 물건에 손대는 일이 없다. 낙서를 하더라도 꼭 허락을 받고 정해진 노트에 하니 이토록 착한 아이들이 또 어디 있을까.
가끔 아이들은 엄마의 식탁의자에 앉아 주방을 응시하곤 한다. 엄마가 바라보는 풍경을 이해하려는 듯한 모습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집이라는 공간은 밥 먹고 잠을 자거나 텔레비전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미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방이 세 개였지만, 딸 넷은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없었다. 언니 둘은 한 방에서 나와 동생은 짝꿍처럼 붙어서 살아야 했다. 책상이 없어서 밥상이 책상이 되었지만, 이마저도 귀찮으면 방바닥에 누워 공부를 했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공부를 하다가 어느 순간 코를 박고 자는 일이 허다했다. 재밌는 건 라디오를 듣거나 일기를 쓸 때는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는데 공부만 하면 그렇게 잠이 쏟아졌다. (그래서 공부를 못했나 보다)
이따금씩 식탁서재에 있어도 피곤함이 느껴질 때마다 눈을 지긋히 감는다. 하지만 어릴 적 누워서 공부할 때처럼 쉽게 나약해지질 않는다. 이곳에서는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긴다. 뭔가 해낼 것 같다. 왜냐하면 식탁 끝자락에는 자격증 시험에 도전할 문제집과 현재 읽고 있는 책, 필사노트가 독서대에 버젓이 올라가 있다. 이곳에 앉으면 나는 그 어떤 공간에 있는 것보다 분주해진다. 유튜브를 즐겨보던 휴대폰은 피아노 음악이 흐르는 오디오가 되어있고, 네모난 골동품 같이 생긴 노트북은 나를 창작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장식품에 불과했던 책은 나를 조금 더 지혜롭게 만든다. 전구색 독서등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식탁서재를 따듯하게 비춘다.
반년 후면 나는 또 다른 집으로 진짜 이사를 한다. 한 해동안 무려 이사를 두 번이나 하게 되다니.
그곳은 1층이라 창문을 열면 나무와 새가 속삭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쿵쿵쿵 뛰어도 누군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더욱 한시름 놓는다. 그때는 식탁을 진짜 식탁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아마도 아이와 함께 공부할 기다란 모양을 가진 책상이 생길 것이고, 지금보다 더 편한 의자도 생길 것이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식탁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덕분에 꿈이 생겼고, 꿈을 꿀 수 있었고, 무엇이든 도전하게 했다. 도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식탁 얼굴은 울퉁불퉁한 주름과 무거운 것에 짓눌려 상처투성이지만 단단하고 올곧은 네 다리는 아직도 청춘이다. 무겁고 힘든 내 마음을 안아주고 쓰러지지 않게 했으며, 항상 용기를 준 당신.
당신의 이름은, '초록지붕 식탁 서재'.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너를 통해 위로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