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는 마음 가는 대로 끄적이는 것
마흔이 넘어 발견한 것: 필사(筆 붓 필, 寫 베낄 사)
고백컨데, 베껴 쓰다 보면 남들보다 나아 보일까 봐, 지적으로 있어 보일까 봐 끄적였다.
누구보다 많이 쓰면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감이 펜을 잡은 손가락이 저려오는 걸 인내하게 했다. 나의 필사는 그렇게 적게 읽고, 많이 쓰는 게 해답이라 생각했다.
내 생애 2만 원이 넘는 노트를 사보긴 처음이다. 게다가 3만 원이 훌쩍 넘는 만년필을 사다니! 미쳤다 정말!
주변에서는 비싼 노트와 펜을 사느니 맛있는 걸 사 먹는 편이 낫겠단다. 한때는 자신도 그랬다. 노트를 사느니 구두 한 켤레를 더 사는 게 나았고, 맛있는 뷔페집에서 배부르게 먹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노트와 만년필은 비싼 구두나 뷔페와 비교해 봐도 하찮은 물건이 틀림없었다.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듯, 자아도취에 빠져 노트와 만년필로 최대한 많이 끄적인 결과물을 사진으로 남겨 블로그에 옮기는 일이 즐거웠다. 당신은 독서량도 많고, 필사도 어쩜 그리 진심이냐며 칭찬일색인 사람들. 오! 타인의 칭찬을 듣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은! 그렇게 나는 자만심에 취해 또 적고 적었다. 비싼 노트 자랑도 할 겸, 최대한 많이 써야 내가 좀 우월해 보이는 것 같았다. 필사의 시작은 이런 사소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부터 깊이 확장되었다.
필사를 잘하는 여성 유튜버를 알게 되었다.
조경국 작가의 <필사의 기초>를 읽고 자신도 이렇게 필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의 책은 병아리 색의 작고 아담했으며, 내가 끄적이는 속도라면 책 한 권을 똑같이 필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이 정도 책 한 권 못 쓸까?, 작가란 게 별거 있나....'
어설픈 필사를 하며 책을 비웃듯 바라보았다.
필사를 하다가 잡고 입던 만년필 심이 툭! 하고 꺾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경국 작가가 직접 내게 말을 건넬 줄은...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하게 문장을 옮겨 쓰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누군가에게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필사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
'이런, 뽐내기 위해 필사를 했던 걸 어떻게 알았지?'
나와 단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도 없고, 심지어 내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듣는 쓴소리는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시퍼런 멍이 든 피부처럼 오랜 시간 머릿속에 맴돌았다.
'필사를 하는 이유가 뭐지?'
처음으로 내가 필사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그에 따른 해답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아무리 깊게 생각하고 생각해도 고민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게 어려웠다. 단순히 남들에게 뽐내기 위해 시작한 필사일지라도 모래알만 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다. 그 당시 나는 매일 글을 쓰기 위해 머릿속 짱구를 굴려가며 글쓰기 주제를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책과 필사는 단순한 내게 영감을 주게 했고, 매일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거꾸로 '나의 글'을 쓰기 위해 필사를 시작했으니 순서야 어찌 됐든 필사라는 순서는 바뀌지 않았다.
이런 것 말고, 진짜 필사의 이유를 조경국 작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필사를 단순히 '베껴 쓰기'라고 생각한다면
고정관념입니다. 필사는 결국 자기 글을 쓰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좋은 글을 베껴 쓰다 보면 나중엔 ‘ 나의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필사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쓰는 필사로 조금씩 나아갑니다. "
문득, 책과 필사 중 어떤 것이 먼저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필사를 하기 위해 책을 읽는가?'
'책을 읽기 위해 필사를 하는가?'
나는 이 두문장에서 이런 속담이 떠올랐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물론 독서를 좋아하지만 필사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은 필사는 좋아하지만 독서를 즐겁게 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건 '책'이 매개체가 되어 너와 나를 하나로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된다. 책이 없으면 필사도 없으니 '책'이야말로 귀한 존재가 틀림없다.
지난 몇 년 간 고군분투했던 나의 필사세계는 다양한 고가의 노트들과 함께했다.
로이텀, 플랜커스, 몽블랑, 펜코, 무인양품 등 여러 노트를 통한 필사여정이 펼쳐졌다.
이중 몽블랑 노트를 선택한 기준은 꽤 단순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 작가의 한 인터뷰를 보고, 바로 이거다 싶었으니까.
"만년필로 원고를 쓰시는데, 고집하시는 브랜드 등은 없으십니까?"라고 작가에게 물었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퀴나, 펠리컨 주버렌으로 통일하고 있는데, 에세이나 평론을 쓸 때는 몽블랑을, 소설은 펠리컨을 사용합니다. 만년필의 몸통에 잉크를 넣어 두는 장치가 잘 망가지는 것은 언제나 골칫거리입니다."
몽블랑 만년필은 백만 원대를 홋가하는 데, 그에 비해 노트는 3만 원 대면 구입 가능했고, 만년필은 '글밥 김선영 작가'가 자주 사용해서 멋져 보이는 '라미 사파리' 정도면 내 수준에서는 적당한 투자가 될 것 같았다.
만년필에 브런치 필명인 '보리똥' 각인을 새겨주니 한껏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내게 또 다른 취미가 생겼다면 필사를 하기 위해 적당한 노트나 만년필을 고르는 일이 꽤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는 것.
매월 10일, 월급을 받자마자 제일 먼저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책을 결제한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한 뒤 꾸준히 블로그에 글을 쓴다.
필사만 하면 지루하니까 똥손일지라도 그림을 곁들여볼까.
젊은 친구들이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즐겨하던데, 나는 '필꾸'(필사노트 꾸미기)를 해볼까.
필사를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내 방식대로 이노트, 저 노트 갈아타며 필사를 하고 있고, 만년필보다 더 편한 천 원짜리 펜으로 필사를 하고 있다. 필사란 거창한 것에 있지 않았다. 단지 마음 가는 대로 끄적이다 보면 내가 생각지 못한 어떤 종착지에 이른다. 그곳에서 방황하기도, 슬픈 마음에 펑펑 눈물을 흘리기도, 아이 같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필사란, 정답이 없다. 쓰고 싶을 때 쓰고 그렇지 않을 때 쉬어가면 되는 것.
누군가에게 뽐내기 위한 필사가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글에 대한 찬사를 글에 옮기는 것뿐이다. 훗날 노트를 보고 생각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울고 웃던 내가 손 흔든다.
'넌 잘하고 있어...'
나이 마흔이 넘어 내가 발견한 좋은 것들 중 첫 번째는 붓 필, 베낄 사, 바로 '필사'이다.
지적이고 싶어서 필사를 시작해도 좋고, 외롭고 힘들어도 괜찮다. 장담컨대, 필사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벗'이 되어 줄 것이다.
*글밥 김선영 작가, 글벗들과 함께 1월 - 주 3회 글 발행하기에 참여 중입니다.
매주, 월, 수, 금요일에, 금요일은 제3화,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책상'으로 찾아옵니다.
책상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