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어 발견한 좋은 것- 책상(冊床)

책상이 없는 사람은 재산이 없는 사람과 같다

by 보리똥

자리에 눕는다.

바닥은 평평하면서 딱딱하고, 콧속은 찬기가 돌지만 베개를 가슴팍에 넣으니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내 나이 열일곱 살, 꽃 다운 청춘임이 틀림없는데 우리 집에는 나를 위한 공간이 없다. 먹고살기도 바쁘니 책상이라는 건 언감생심이고, 조용히 누울 방바닥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밥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 배를 깔고 방바닥에 누워있는 게 좋았다.


내가 바닥에 눕는 시간은 저녁 8시, 라디오를 듣기 위해서다. 지난주에 방송국에 사연을 하나 보냈는데, 혹시 편지가 소개될까 봐 떨리는 마음으로 라디오 전원을 켰다. 지지 지직~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내가 보내는 사연 대부분은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으므로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마다 편지를 자주 쓰는 아이였다. 혼자 쓰는 글은 재미없지만 가까이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꽤 흥미로운 활동이었다. 편지를 받은 친구는 답장을 보냈다. 이 친구와 오랜 시간 편지를 하면서 글로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는 사연을 보냈다. 생각해 보니 별 볼일 없는 사연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이런 과정 하나하나가 특별했고, 반짝이는 펜으로 단정한 편지지에 손글씨를 쓰는 일이 즐거웠다.


보낸 사연은 안타깝게도 채택되지 못했다. 만일 채택이 되었다면 코너마다 선물을 보내주는게 꽤 쏠쏠했다. 스킨로션 세트, 여드름 범벅인 피부에 방송국에서 보내준 화장품을 바르면 백옥 피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에이솔루션이라고 하는 여드름 전용 화장품을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날은 고름진 여드름에 닿자마자 따가워서 혼줄이 났다. 시뻘건 피부가 더욱 홍당무가 돼버리는데 이 모습은 긴장할 일이 생길 때마다 더욱 심해졌다. 지긋지긋한 이놈의 여드름!


으랴차! 방바닥에서 몸을 힘겹게 일으킨다.

우리 집 거실에는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얻어온 초록색 소파가 있는데, 거실 햇볕이 드는 오후면 소파위로 먼지가 날개 단 듯 둥둥 떠다니는 걸 볼 수 있다. 정말 딱 이 시간만 볼 수 있는 먼지인데, 때로는 무지개 색깔로 변신 했던 신기한 모습이다. 아마도 빛이 주는 어떤 환상 일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내 나이 마흔 살이 넘었다.

더 이상 딱딱하고 차가운 방바닥도, 먼지로 뒤덮였던 초록색 소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잘 듣던 라디오도 듣지 않는다. .


사실 마흔 이전까지는 책상의 필요성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이 나이에 지긋지긋한 공부를 다시 할 것도 아니고, 독서와도 담쌓고 지냈으니 내 생전에 밥 먹는 식탁하나면 충분했다. 이랬던 내가, 언젠가부터 글을 쓰더니 책을 보고 필사를 했다. 내 평생 자신을 마냥 '꼴통'이라고 여겼는데, 이런 꼴통도 책을 보며, 글을 쓴다.


오래된 집에서 살다가 이사를 하며 가장 갖고 싶었던 건 나만의 공간에 있는 책상이었다.

책상 하나를 고르는 게 옷을 사는 일보다 더 어려웠기에,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며 고민했다.


나는 안방 어딘가의 공간에서 나만의 책상 앞에 앉아있다. 열일곱 살의 내가 간절히 바라던 나만의 책상을 마흔 살이 넘어서야 갖게 되었다

책상 아래에는 짙은 밤색 원목에 두 개의 서랍장이 있는데, 서랍은 얕지만 윤기도는 머리카락처럼 부드럽게 열고 닫힌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독서대, 필사노트, 스누피 달력, 그림책 안녕 달 작가의 스탠드 조명이 빛을 내고 있다.

이 공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수두룩하다. 앗, '빨간 머리 앤'의 조각퍼즐도 있다. 나는 빨간 머리 앤의 천진난만한 성격과 그녀의 언어를 좋아하는 광팬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마음씨가 부럽다.

이 겨울에 책상에 앉아 찬란하게 피어있는 벚꽃 길을 걷고 싶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라고 할까.


아이들은 엄마의 책상에 앉아있는 일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두 아이에게 가장 먼저 선물해 준 게 책상이었다. 책상이 있는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책상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고유한 공간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곳에서는 그림과 공부, 게임을 해도 좋다. 내 자리니까 저리 가라고 재촉할 사람도 없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보다 자신만의 책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상은 곧 '공간'을 의미한다.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 진짜 내가 되는 공간, 쉼... 만약 이런 공간이 없었더라면, 이미 내 마음은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답답해서, 내가 나를 잘 몰라서,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들을 실컷 미워하다가 또다시 스스로 아파했을 것이다.


인간은 책상을 소유하고부터 자신을 돌아보고 손끝을 움직이게 된다.
다시 한번 시인 이상의 말을 빌려 부언하자면,
책상이 없는 사람은 재산이 없는 사람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사람이다.

<아무튼 서재, 김윤관>

열일곱 살의 가난했던 나는 차가운 방바닥에서라도 편지를 썼고, 부드러운 베개가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 비싼 책상이 아닐지라도 이제야 나만의 책상이 생겼다. 각진 몸, 튼튼한 네 개의 다리, 부드럽고 온화한 너의 얼굴을 쓰다듬을 때 온 세상을 가진 것만 같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함께 할 나만의 책상, 나는 그렇게 너와 친구가 되었고, 너는 나와 친구가 되어주었다.







*글밥 김선영 작가, 글벗들과 함께 1월 - 주 3회 글 발행하기에 참여 중입니다.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월요일은 제4화,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글쓰기'로 찾아옵니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