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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Jun 13. 2021

배달음식점이라고 다 같지 않습니다

25년 장사 경력이 헛되지 않은 이유



결혼과 동시에 시작한 음식점이 어느새 햇수로 25년이 됐다. 당시 내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성실하게 다니던 대기업에 사직서를 냈다.  처음 시작한 분식점에서는  찐빵과 김치만두를 만들었다. 특히 솥에 갓 쪄낸 찐빵은 아기 엉덩이처럼 토실토실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추운 겨울 음식 만드느라 손이 부르트는 줄도 모르고 20대 중반 나이에 찐빵과 만두를 빚었다. 친구들은 예쁜 옷을 입고 가게에 찾아왔다. 화장기 하나 없던 나를 보며 고생이 많단다. 나는 갓 쪄낸 찐빵과 김치만두를 친구에게 내놓는다.

"어머! 얘, 음식장사 처음 한 것치곤 맛있다. 체질인가 보다."

그 어떤 말보다 맛있다는 말이 최고로 듣기 좋은 말이었다.


결혼 후 나는 임신을 했다. 식구들은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신체 활동이 많은 탓에 양수가 적어 눈에 띄게 배가 부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막달이 돼서야 임신한 사실을 눈치챈 엄마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가게 문을 닫을 순 없었다. 이른 주수에 진통이 찾아왔고, 병원에서는 자연분만을 유도했다. 20시간을 진통에 시달렸지만 결국은 제왕절개로 아들을 출산했다. 딸만 넷인 집에 아들 손자가 믿기지 않았는지 부모님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셨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에게 길러졌다. 나는 쉬는 날이나 겨우 아이를 볼 수 있었는데 어찌 된 게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잘 따르는 아이였다.  


도시로 나가 장사해볼까?

텔레비전에서 연예인이 나와 광고하던 규모가  큰 쇼핑타운이었다. 의류 쇼핑몰이었고 고층에 다른 음식점과 함께 입점하는 방식이었다. 시골에서 아무리 발버둥 치고 장사해봤자 큰돈을 벌기는 어려웠다. 손님들도 이 정도 맛을 낼 줄 알면 시내로 나가 장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벌어 온 돈 1억을 계약금으로 지불했다.  당시에는 분식점 프랜차이즈가 활성화된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허를 내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해도 됐다. 나는 젊고 도전과 패기 하나로 똘똘 뭉친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렇게 잘 나갈 것 같던 쇼핑타운은 건물을 올리다 말고 부도가 나버렸다. 덕분에 계약금을 몽땅 떼였다.  가게 이름이 '거지의 밥통'이었는데 정말 이름처럼 거지가 돼버린 거다.


이후 여윳돈 없이 여기저기 끌어모은 돈으로 겨우 삼겹살집을 차렸다. 무거운 솥뚜껑에 삼겹살과 김치, 콩나물을 함께 구웠는데 젊은 직장인들의 반응이 좋았다. 특히 시골에서 직접 만든 김치는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삼겹살 주문보다 공짜 김치를 달라는 손님이 더 많았다. 장사가 안된 건 아니지만 삼겹살 1인분에 공짜로 나가는 음식이 많아지면서 동네 장사 한계성을 느꼈다.


몇 년이 흐른 후  지금보다 큰 도시로 가게를 확장 이전하게 됐다.

오픈 집 메뉴는 가마솥으로 밥을 지어 만든 '비빔밥'이었다. 처음 오픈 발이란 게 있긴 했지만 이마저도 현상 유지에 그쳤다. 하는 수없이 삼겹살에 각종 야채가 가득한 '쌈밥'으로 메뉴를 바꿨다. 당시 쌈밥도 유행을 타던 시기라  획기적인 메뉴를 생각해낸 것이 곤드레 밥이었다. 강원도 속초가 고향이었기 때문에 곤드레 하먼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향긋한 곤드레 밥과 즉석으로 먹는 매콤한 제육볶음은 맛있는 짝꿍이었다. 블로그 여기저기 맛있다는 후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규모가 크다면, 더 잘되지 않을까?'

 월세 350만 원 가게로 이전을 했고, 음식에 대한 주변 반응은 괜찮았다. 블로그 후기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고, 3사 방송국에서 촬영 섭외가 올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하지만 가게를 이전한 지 4년이 되었을 때 몸이 심상치 않았다. 자주 찾아오는 피로와 극심한 생리통은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직업에는 최악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을 찾아가니 '자궁선근증'이라는 병명을 받았다.  자궁이 정상 위치를 벗어나 비정상적으로 존재하는 자궁내막 조직에 의해  자궁 크기가 커지는 질환을 말한다. 어쩐지 밥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는데 임신 4개월이라 할 정도로 배가 불러왔다. 불러오는 배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하고 살이 쪄서 배가 나오는 거라 생각했다. 병원에서는 이미 증상은 호전되기는 어렵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궁적출술을 선택하라 했다. 선택의 기로가 없었다. 이미 자궁적출술은 주어진 운명이었다.


'조금만 참으면 된 건데, 하필 장사가 잘 되고 있을 때...'


"수술 후 무리한 운동이나 힘든 일은 삼가세요. 몸 컨디션이 예전 같진 않습니다."



사정상 가게 문을 잠시 닫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곤드레 집 주인장-


잠시 문을 닫겠다고 했지만 몸 회복은 더뎠고, 가게 복귀까지 5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오픈을 위해 대형 식자재 매장을 들러 필요한 각종 야채와 재료를 구매했다. 손님이 음식점에서 주문한 단출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식재료들이 필요하다. 마늘, 양파, 대파, 북어, 야채와 쌀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양파껍질을 벗긴 후 칼로 얇게 자르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눈앞이 뵈질 않는 거다. 하는 수없이 칼과 맞닿는 손의 감각으로 양파를 잘랐다. 양파는 양파니까  눈이 매운 거고, 눈물은 그간 서러움이 북받쳐 흐르는 거였다. 누가 보면 청승 떤다고 할까 봐 잽싸게 눈물을 닦았다.


오픈 시작과 동시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그나마 오던 단골손님도 발길이 끊겼고, 온천지구 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여기저기 장사가 안되다고 난리였고, 폐업 가게가 속출했다.


*월 **일 ~*월**일 경기도 '***음식점'방문자는 가까운 보건소 선별 진료소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안전 안내 문자>


안전 안내 문자를 받는 횟수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음식점 방문을 자제했고, 외식보다는 배달음식으로 대신했다. 월세를 내고 현상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는 수없이 보증금으로 월세를 대신해야 했다.  '일 년 중 반년, 딱 반년만 버티면 되지 않을까?, 보증금을 까먹더라도 조금만 버텨보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시작된 지  1년, 얼마 남지 않은 보증금이 바닥을 보일 때쯤 과감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25년 장사 인생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월 100만 원, 조금 더 작은 평수로 이전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늘 큰 사업을 꿈꾸던 내가 25년 전으로 돌아가 장사를 해야 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비어있는 가게를 찾기는 식은 죽 먹기다. 심지어 장사가 안되니 인테리어를 그대로 해 놓고 나간 곳도 많았다. 잘 알아보면 인테리어 비용을 줄이고 새로운 가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이전한 가게는 파스타 전문점을 하다가 그만둔 곳이다.  크게 손볼 것 없이 그대로 가게를 시작해도 됐다.

'이곳에서는 잘 될 수 있겠지.'

아무리 불경기라지만 이 정도 월세 면 어느 정도 현상 유지 이상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역 일대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번진 것이다. 반년을 버텼지만 더 이상 버틴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홀을 접고 과감히 배달업종으로 바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까지는 갓 나온 따끈한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할 때 음식 경영에 큰 보람을 느꼈다. 식사를 마친 후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손님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도자기 접시가 아닌, 얇고 딱딱한 용기에 담아야 했다. 완성된 요리를  비닐랩으로 꽁꽁 묶는 행위는 25년 음식 경영에 커다란 흠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자존심은 내려놓고 지금보다 더 진심을 담은 요리를 해야 했다. 즉석으로 먹는 요리는 아닐지라도, 음식을 먹는 소비자는 언젠가 진심을 알아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토요일, 곤드레 밥 100인분 주문

곤드레 집


밤 잠 설치며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곤드레 밥을 만들었다. 된장 절인 아삭이 고추, 무채, 제육볶음을  담아 100인분을 완성했다. 자! 이제 배달할 일만 남았다.


"서로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이번 주 토요일이 아니라 다음 주 토요일이에요. 미안합니다!"


곤드레 밥 100인분은 그렇게 주인을 잃은 채 가게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방법이 없었다.  소득은 없지만 누군가 내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기부였다.  여기저기 기부할 곳을 수소문했다. 조금이라도 빠른 시간 안에 곤드레 밥이 주인을 찾아가야 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 맛있게 먹겠습니다!"

시내에 위치한 노인협회에 곤드레 100인분 모두를 기부했다. 비록 노력한 것에 비해 매출은 빵이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고 편안했다.  



나는 누구보다 젊은 나이에 음식점을 시작했고, 행복보다는 고난과 시련이 더 많은 날을 살아왔다.


음식점으로 아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짧았고, 남들은 즐겁게 여행을 떠날 때 땀 흘리며 장사를 해야 했다. 때로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부러움은 순간이었다. 내 삶에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고객이 맛있게 먹어줄 때다. 내가 행복하다면 고객도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달업을 선택했다. 예쁜 접시에 따뜻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고객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1회용 그릇이라도  진심을 담아 요리했다.


배달음식이라도 언젠가는 진심이 통할 거라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더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25년 경력 자랑스러운 한식 요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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