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좋은 점은 걸으면서 '행복해졌다'가 아니라 '우울함을 받아들이기 쉬워졌다'라는 것이다. 삶의 허무함은 산책의 허무함과 흡사하다. 어차피 돌아올 길을, 그것도 똑같은 길을 뭘 그리 매일 다녀야 할까. 그런데도 매일 똑같은 길을 나서면 한 번도 같지 않은 내가 있고, 타인이 있고, 세상이 있다. 그냥 걷는 것이고 그냥 사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럴 때 덜 우울해진다. 산책은 무용한 삶에 대한 우울함의 연습이다. 뭐든 연습하면 좋아진다는 말이 맞다. 내 삶이 유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용한 것이 산책처럼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걷는 생각들/ 오원
주말 저녁 가족과 함께 시골에 내려갔다. 남편이 퇴원 후 처음 가보는 시골 여행.
밤 10시, 아이들과 할머니, 남편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매향리 평화공원을 찾아갔다. 아파트에 살면서 맘 편하게 밤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오랜만에 고향 하늘을 올려다보니 커다란 나무 사이로 가득 찬 별들. 어릴 적 보았던 별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마치 '세월이 흘러 너는 변했어도 나는 늘 너를 기다렸다'라는 듯 묵직한 모습이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살짝 오싹한 느낌이 감도는 늦은 밤이었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신난 모습이다. 첫째는 할머니 손을 잡고, 둘째는 아빠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갔다. 가는 길마다 벤치는 엉덩이를 붙이고 쉬어가기를 재촉했지만 늦은 밤이라 지체할 틈이 없었다. 우리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게 목적이므로 지나치는 벤치마다 쉬었다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파란 불빛이 비치는, 오래전 그날 미군이 직접 운행을 했던 493호 비행기. 앞뒤 두 사람이 탔을 법한 운전석에는 노란 머리 미군이 앉아 손을 흔들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기가 약한 나는 어디서 건 쓸데없는 상상을 한다.) 비행기를 한참 바라보다가 현실감 없는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했다.
불빛을 등지고 있으니 할머니와 첫째 그림자가 거인처럼 커다랗게 변해있었다. "와! 할미, 누구지?" 체구가 작은 첫째는 자신의 그림자가 커진 걸 보더니 신기한 듯 이야기했다. "저기는 할미, 여기는 너다!" 무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더니 아이는 놀라서 아빠 곁으로 줄행랑이다. 아이가 뛰는 속도를 맞추기 힘든 할머니는 허리가 아픈지 왼팔로 허리를 짚고 뛰었다. 연세가 들수록 아픈 곳이 많아지는 엄마.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걷는 산책길은 그 어떤 시간보다 행복한 시간이다.
시골을 갈 때마다 항상 찾게 되는 매향리 평화공원. 봄이면 넓은 밭에 유채꽃이 한바탕 피어있고, 여름이면 푸른 잔디가 가득하다. 가을이 되면 온 천지가 코스모스 천국이다. 나는 특히 가을을 좋아하는데, 이번 가을에는 어떤 모습을 지닌 코스모스가 만발해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생은 꽃과 같아라 산책은 꽃이어라! 한없이 아름답고 한없이 무용한.
걷는 생각들/ 오원
예쁘게 핀 꽃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어른과는 사뭇 다르다. 꽃을 바라보는 마음이 순수해 보인다. 작은 콧구멍으로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꽃 잎 한 장 한 장 신기한 듯 곱게 만져본다. 꽃이 잔뜩 피어있는 곳에 가면 아이들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같은 꽃이지만 다양한 색깔을 지닌 꽃들. 올가을, 매향리 평화공원에는 아이들 눈이 반짝일 꽃들이 가득할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매일 똑같은 길이지만 한 번도 같지 않은 내가 있고, 타인이 있고, 세상이 있다.(p.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