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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Oct 22. 2022

타샤 튜더 할머니 필사를 시작했다

내 마음의 풍금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평일이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육아와 직장일에 지칠 때마다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꿈이요, 엄마라는 보이지 않는 의자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단 하루라도 끼니를 챙기지 않으면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난리일 것이고, 엄마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문득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 제목만 보더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이다음에 크면 반드시 도시에서 살아보는 게 꿈이었다. 어릴 적 뽀얀 우윳빛 피부와 깨끗한 옷과 신발을 신고 검은색 자동차를 타고 내리던 소녀를 기억한다. 소녀는 옆집 친척이었는데 방학마다 시골에 내려왔고 새침하고 도도한 모습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모두 저 아이 같은가 봐.' 하며 소녀 모습을 동경했다. 당시 내 모습은 낡은 체크무늬 치마와 살색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 핑크색 고무로 만든 슬리퍼 하나면 동네를 종행무진 할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소녀의 핑크색 레이스 달린 샌들을 보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한쪽 슬리퍼를 종아리에 숨겼다. 소녀는 이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소녀는 내가 노는 모습만 지켜볼 뿐,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있던 날이었다. 별은 움직임 없이 같은 자리에서 반짝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을 준다. 하얀색 잠옷을 입고 하늘을 바라보는 소녀 모습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모습에 도시 사람이니까, 도시 사람은 그럴 수도 있겠다며 소녀를 이해하려 했다.


이튿날 소녀는 짐가방을 들고 승용차를 타기 위해 나섰다. 처음 봤던 모습보다 더욱 하얀 얼굴이었다. 소녀는 이후 방학 때마다 시골을 찾아왔다가 말없이 돌아갔다. 문득 나는 오래전 소녀가 느꼈을 감정을 헤아려본다.

학교와 학원을 사이에 두고 친구들과 경쟁하듯 공부해야 했을 것이고, 기대했던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부모님은 실망이 컸을 것이다. 그런 부모님께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아서 오롯이 앞만 보고 달렸을 소녀. 친구들과의 달콤한 놀이도 즐기지 못했을 것이고, 재미있는 만화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던 소녀가 방학이 되면 시골집으로 도망치듯 달려왔다. 시골에서는 공부도 엄마의 잔소리도 듣지 않고 자연과 벗 삼아 지냈다. 여름이면 들꽃 천지에 풀 냄새가 싱그럽다. 밥상에는 아삭한 오이, 콩나물국, 매콤한 고추를 된장에만 찍어먹어도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소녀에게 시골은 그런 곳이었다. 외로운 도시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을 곳.


어른이 되고 어린아이들을 둔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도시 사람이 되어있다. 흙을 밟고 사는 게 이상하리만큼 아스팔트 길 천지인 곳에서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 또한 어린이집 놀이터나,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는 게 하루 놀이의 전부이다. 이마저도 엄마가 피곤해서, 제발 어린이집 하원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이들을 겨우 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햇볕을 많이 보지 않고 사는 아이들 피부는 그 옛날 소녀처럼 피부가 하얗다.


평일에는 직장을 다니다가 금요일마다 시골집으로 퇴근한다면 지루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을까. 시골집에서 주말을 보낸 후 도시로 떠나는 마음은 또 얼마나 설렐까. 시작과 떠남, 떠남과 시작이 공존하는 도시와 시골생활 여정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꽃이 피고, 설렘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고추와 호박을 기르고, 예쁜 정원을 만들고, 사랑하는 소망이(고양이)와 함께 하는 느긋한 모습이 기분 좋다.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에서 마침 <타샤 튜더> 할머니가 등장했다. 타샤 튜더는 <소공녀>, <비밀의 화원>을 그린 미국의 동화작가이자 삽화 가다.

천천히 그리고 고요히, 그는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살아간다.너른 정원을 돌보고, 스토브로 아주 느리게 요리를 한다.
동물들을 돌보고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살림살이를 꾸려간다. 그리고 자연의 힘을 믿고 인내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험난한 삶을 개척하는 강인함을 가졌다.

허리가 굽고 야윈, 스스로 사교성이 없다고 말하는 아흔이 넘은 노인은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나는 그 얼굴에서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함과 반짝임을 보았다.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 김미리 지음


나는 다시 책을 통해 <타샤 튜더>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어릴 적 소공녀나 비밀의 화원을 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할머니 그림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타샤 튜더 할머니에게 매료되었다.

할머니 책은 빠르게 읽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사진에서 주는 영감이 크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책장을 넘겨야 한다. 게다가 좋은 구절은 필사해야 한다. 필사할 때 흑백 사진으로라도 할머니 모습을 함께 남기고 싶었다.


할머니 모습에서 삶의 여유가 생기고, 외롭다고 느낀 삶이 용기가 생긴다. 어릴 적 나는 도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도시인의 삶은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못하더라. 대형 쇼핑몰 불빛이 반짝이고, 언제든 시간만 허락한다면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지만, 풀벌레 소리와 코끝에서 맴도는 흙냄새를 맡을 수 없는 아픔이 생겼다. 마음 한편에서는 어릴 적 모습이 그리웠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타샤 튜더 할머니 이야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닿을 때까지 그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타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정원이다.
눈 녹은 4월부터 찬 서리가 내리는 10월까지 관심의 대상은 정원이고, 그 결과는 숨 막힐 지경이다.
노란 수선화와 여린 레몬빛 수선화 무리 속에서 분홍색과 흰색 돌능금 꽃이 피는 5월 중순이나, 진보라, 감색, 크림색 참 제비 고깔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6월 초에 접어들면 그녀도 자랑하듯 '지상천국'이다.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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