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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Oct 04. 2022

모든 사랑은 '이기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묵자의 사랑에 관련하여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희생'을 생각한다. 하지만 묵자 사상에서는 반대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비공[非攻]이라는 말처럼 아닐 비[非]는 실로 '반대한다'는 말과 근접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말과도 같다. 이는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시작해서 '이타주의'로 시작되어 결국 '이기주의'로 행해지는 인간의 사랑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대로 사랑이 만약 '이타주의'로 시작한다면 우리는 '이기주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출처 : 네이버 책









01. 사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당시 제자백가 춘추 전국 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한다면 대표적으로 두 분을 꼽을 수 있다. '묵자와 양주'이다. 맹자도 노자도 공자도 장자도 아닌 바로 '묵자와 양주'인 것이다. 특히 '사랑에 대한 담론'에 있어 유학사상을 깨고 자유로운 '사랑의 사상가'로써는 묵자를 따라올 이가 없었다고 한다. 맹자는 말했다.


"지금 유학 담론에서 묵자 아니면 맹자 이야기만 한다."


제자백가 시기의 사상의 자유가 사라지고 공자와 맹자와 같은 유학의 보수적인 담론이 시작되었다.





강한 것이 아름답고, 공동체적 '기독주의'의 힘이 강해지는 시기였다. 국가로 인한 적과 동지는 더욱 강해지는 시기였다. 책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내용을 참고하여 말을 하자면 국가로 인해 군대와 공권력이 증대함에 따라 '사람간의 인과관계'가 없는 '살인행위' 즉 '전쟁'이 심해지는 사상이 과열되어 있었고 한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이이나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을 간 한국인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전쟁을 다녀온 사람들은 '서로를 살리기 위해 다른 민족을 죽였다. 당시 파병을 가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는국가를 위해 전쟁을 펼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타인을 해하고 왔다는 그 자체에서 '문제'가 있음에도, 국가를 위해서가 아닌 '소수의 공동체'를 위해 민주성을 펼쳤다는 말 역시 진실로 공정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전쟁을 놓고 반대하는 사람이 '정당한 전쟁인지 아닌지'를 논한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일까? 평화주의자같은 가면을 쓰고 논리적으로 사유를 한다는 것에 있어, '전쟁'을 문제삼지 않고 그것을 심층 고려후 만약 합리적이라면 '죽인다'는 말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전쟁'으로 끝나는 것. 그 사유자체가 게으른 질문이 아닐까?





모두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는 원칙이란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묵자가 말했다. “다른 나라 보기를 자기 나라 보는 것과 같이 하고, 남의 봉토 보기를 자기 봉토 보는 것처럼 하며, 남의 몸 보기를 자신의 몸 보는 것같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제후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베푸는 은혜와 바치는 충성이 있게 된다. 또 아비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면 인자하고 효성스럽게 되며, 형제가 서로 사랑하면 화목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면 강한 이가 약한 이를 핍박하지 않으며, 다수가 소수에 행패를 부리지 않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신분이 높은 이가 비천한 이를 경시하지 않으며, 약삭빠른 이가 어리석은 이를 속이지 않게 된다. 세상의 모든 전란, 찬탈과 원한은 서로 사랑한다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진 이는 이것[兼相愛]을 찬미하는 것이다.”

-『묵자』「겸애·중」









02. 사랑은 '내 자신이 사랑스러운 상태, 스스로가 행복한 상태'여야 한다.


 누가 누군가를 죽인다. 그 대상이 '나와 다른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에서. 더 이전으로 들어간다면, '서로간의 공동체에서 오는 이기심' 때문인 것이다. 인간이 서로간의 이러한 가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공동체적 사랑이 아닌 개인(즉 나 자신을 먼저 행복하고 사랑함)에 시작해야 이타성으로 넘어오고 그래야  책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말처럼 '이타심(사랑)'이 절망으로 초라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애초 유교주의 속 가족에 대한 사랑도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지점이다. '조지 고든 바이런'이 비난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체제에 있는 통치에 해당하는 키워드들을 반대한다는 점이다. 사랑한다면, 내가 행복하고 그래야 지속이 된다. 그렇다면 '가족'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옳지는 않다는 점에서 '가족애' 자체를 말하는 것도 결국 '사랑'이 아닌 '공동체주의 이타성'으로 지속되지 않는 사랑을 말한다는 것이다 (묵자 중심에서)





묵자편은 '성문수기법' 그러니까 공격에 대한 '편론'자체도 논하지 않는다. 약자를 돕는 사람. 말 옆에서 자는 사람. 우리는 협객이라는 주장을 편 '묵자'의 사상. 어떠한 대립으로 공동체간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사람들인 것이다. '겸애'를 중시하면서도 함부로 타인을 헤치거나 목숨을 걸고 약한자를 돕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말로만 환경을 실천하겠다면서 마치 트렌드 처럼 환경주의를 옹호하는 현 시대의 사람들과도 닮아있다.




출처 : 나무 위키 조지 고든 바이런 (The Lord Byron)


 우리는 말은 하면서도 실천을 뒤틀리는 과정에서 '절망'과'비극'을 가지는데, 이는 시인 '바이런'의 삶에서도 들어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강자는 반드시 약자를 핍박할 것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며, 신분이 높은 자는 비천한 자를 경시할 것이고, 약삭빠른 자는 반드시 어리석은 자를 기만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전란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반대하면 무엇으로 그것을 바꾸겠는가?


묵자가 말했다. “서로 사랑하며[兼相愛] 서로 이롭게 하는[交相利] 원칙으로 그것을 바꾼다.”

『묵자』「겸애兼愛·중中」









03.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행복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좋은 결론이 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며 [兼相愛] 서로 이롭게 하는 [交相利] 원칙으로 그것을 바꾼다."

-『묵자』「겸애·중」





어떤 사람이 복숭아를 훔쳤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짐승을 훔쳤다. 그렇다고 복숭아를 훔친 사람이 짐승을 훔친 사람보다 덜 나쁜가? 불인과 불의는 진실로 타인을 해친 것에서 많을 수록 그 죄는 많아진다는 원론적인 사상을 들어보자면, 묵자는 이를 반대하여 말한다. 불의는 저지른 것 자체에서 부터 잘못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기주의'의 마음으로 사랑을 하면 잘못된 것이라는 오해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


사랑은 '이기주의'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해야 내가 행복하고 사랑스러워 보이기 위해 더 행복함을 느끼려 애쓸 것이고, 사랑하는 상대에게도 서운하거나 '타인을 사랑하며 스스로가 낮아지면서 끔찍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지속성이자 묵자의 사랑이다.


이기주의에서 시작해 이타주의로 가고 다시 이는 이기주의로 '나의 사랑'으로 되찾을 수 있게 되지만, 이타주의에서 시작한 사랑은 돌아갈 수 없이 스스로를 망가트리게 된다는 점에서 무조건 적인 '신을 숭배하는' 기독행위에 대한 반대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는 진시황의 『사마천』에서로 묵자가 반대하는 부분이 함축되어 알려진 바 있다. 남녀 평등을 말하는 것 자체가 남 과 여를 가르고 있다는 사실처럼 말이다.





어떻게 해서는 '나로 부터 충만해진 상태'에서 가야 한다. 그래야 사랑은 지속된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담론을 뛰어넘어서게 만든다. 이말은 즉슨, 내가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한다 함은 '내 스스로가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상태'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스스로가 지치지 않고, 억울하지 않은 사랑을 정직하게 지켜나갈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한 때 누군가에게 열렬히 사랑했을 때, 내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진적이 있었다. 스스로가 끔찍하고 초라하게 느껴졌고 좋아하는 대상은 너무 크고 높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 사랑의 결말은 좋지 못했다.


반대로 내 자신이 좋고 사랑스럽고 당당했을 때는 기꺼이 주어도 초라함이 없었다. 그래서 타인도 나에게 더 쉽게 사랑을 허용했고, 결론적으로 그 당시 이별을 했지만 끔찍하거나 단 1도의 후회나 아쉬움이 없음은 '내 자신이 이기적으로 사랑했고, 충만했고, 그런 감정을 가지기 위해'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 사랑함은 '나를 위한'것인가? 그 타인을 위한 사랑인 것인가?
당신의 사랑이 '이기적'이지 않다면, 당신은 '아깝고 끔찍한 경험'을 남기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자신을 사랑함이 기초로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을 멈추어야 할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행복해서 하는 사랑'이라면 지속하라고 말해주고만 싶다. 사랑은 '나를 위한 선택'이지, 타인을 위한 희생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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