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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Oct 05. 2022

'개인주의' 위한 당신의 욕망, 자유 경계선을 지켜라.

춘추전국시대 양주의 『여씨춘추』,『열자』,『양주』,『도덕경』,『장자』









01. 만약 당신이 돈이 없고 굶주려 있다면, 음식을 훔칠 것인가? 굶주릴 것인가? 


국민들이 돈이 없고 부채가 많은 것은 국가가 '빚'을 지게 요구한 '그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일자리가 있고, 먹고 살만큼 의 경제적 소비를 할만한 재산을 준다면, 누가 '자살'을 할까. 모든 죽음은 사실, '돈'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다. 순진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한 인간이 생계가 어려워 지면 그 수치심과 절망감은 끔찍하다. 피할 수 없는 어떠한 벽안에 갇힌 상태인 것이다. 노숙자를 보면 절망에 빠지는 것도 여기에 있다. 『여씨춘추』의 양주의 마음을 알아보자.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 이기심'을 펼쳐야 한다.


강단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가 비굴하고 초라해지는 쪽으로 간다면, 양주와 반대로 속칭 '유교적' 국가를 위한 중심의 질서 토대로 고개를 숙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 나를 핍박해 온다면 확 죽어버리듯 통제 당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당 최저시급도 받지 않고, CCTV 감시 아래 통제를 받았던 나의 20대를 생각한다면, 나는 그러한 작은 직장들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럴 바에 그만둔다'는 마음으로 미련을 버리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장이나 사회규율에 질질 끌려가는 순간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어느 순간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자살쪽으로 몰고 가는 선택'으로 가기 때문이다.









출처 : 리디북스


유학은 잔혹하다. 삶에 대해 모든 이를 사랑하자는 이념을 펼친 묵자의 이념과 달리 양주의 논리는 '국가 질서의 부정'에 있었다. 묵자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부정과 개인주의를 강조하고 '사랑'에 관해서는 무아를 펼친다는 이념이었다면 양주는 '국가'를 부정하고 약간은 비정하게 느낄 정도로 삶에 있는 적들을 붕괴시키고자 하는 태도가 강한 이었다. 묵자와 양주는 같은 아나키니즘 anarchism 지배를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적과 동지라는 점에서 묵자는 '자신의 생마저 남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내버리는 점' 양주는 '자신을 챙기면서 그 외에 국가와 사회에 대해 위해가 된다면 배척한다. 즉 국가와 사회는 철저히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한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다.


왕족의 국가들은, 왕족의 아래에 보호를 받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다. 마치 공자의 세계관처럼. 진시황의 천하통일의 토대는 여불위를 구축했는데 이 세계를 잡아 만든 책은 『여씨춘추』 이다. 여기에는 양주의 후학들의 말도 싣어져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중심으로 '맹자'의 텍스트와 일치되어 있는 부분을 분석하다보면, 죽간의 경전들은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유교적 관념들이 많이 있다.










2. 국가의 구조적인 문제 중 하나는 한 인간의 '자살함'을 전개시키는 시스템에 있다. 


OECD국가에서 자살율 1위인 사람들은 '회사에 취업이 안되고 자신이 돈을 못벌고 한심해서' 죽는 심리라면, 국가의 입장에서는 부채를 더 남기지 않고 사유재산없이 사라지는 제스처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살한 사람은 국가에 완전히 지배당한 심리적 양상인 것이며, 국가에 대한 지배를 '정당한 논리'로써 인정한 측이 되며- 국가의 입장에서는 '떨어져 나간 한 명의 짐'을 해방 시킨 측이 됨으로써 끔찍한 맥락을 전개시키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 무력함을 '이기심'으로 생각한다면, 내 자신만 생각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범죄를 해서라도 살아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처량하고 홀로인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심리를 버리고우리가 각자 '자신만 생각하고 국가를 배척한다는 당당한 권리'를 내세운다면, 한 인간이 자살할 확률은 현저히 떨어질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범죄를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21세기 개인주의에서 산다고 함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단절시키는 행동'에 있다.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다. 자신의 규칙 그리고 붕괴시키지 않아야 하는 공동체의 일정 선과 규칙을 따르면서도,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태도와 같다. 그래서인지 묵자와 양주가 학을 펼치던 시기에는 공자와 맹자(유교주의)는 어떠한 신분적 질서와 겸을 주장하더라도 당시 국민들에게 수용되지 못했다. 완전한 헤게모니 였다. 어쩌면 춘추전국시대는 어제 쓴 칼럼의 서문말대로 '자유로운 시대'였다. 어쩌면 지금의 시기보다 '묵자와 양주'의 말처럼 '이기주의'가 강했던 그 시기였다. 지금은 국가의 어느정도 통치와 펼칠 수 없는 경제적 질서와 빈부격차로 인한 일자리의 수요가 적은 동시에 이가 사람의 말에 대한 허용의 강제가 '춘추전국시대'보다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을 까 생각이 든다.










3. 욕망을 선택하라. 그리고 내 선택권을 침범하는 것들을 경계하라.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만약 내가 뭔갈 하는 데 옆에서 계속 간접적으로나마 시비를 걸어 온다면, 직감적으로 당신이 불쾌했다면- 타인에게 '자신의 표현'정도는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완전한 삶이고, 양주가 지향하는 삶이다. 그래야 행복하고 유쾌해 진다. 억압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란 간단하다. 내 삶에 '감정'이 올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검열을 하면 안된다. 내가 슬프면 슬픈 상황인 것이며, 내가 화가 났다면 분노할 상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문제로 돌아가 버린다면 '도망가는 사람'과 뭐가 다른가. 내 삶에서 오는 수많은 억압... 70-80년대 억압이 팽배했던 그 시기.. 핍박받는 쪽에서 우리는 권력을 벗어나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망가지더라도.. 스스로가 망가지더라도.. 그런 것들에 불편함을 느끼지 말고, 그것이 나쁘다거나 창피하다고도 느낄 이유는 없다. 대안은 사회가 심어놓은 그 모든 망상화된 예쁜 포장지를 벗겨서. 당당히 행동하며 '러시아의 아나키시트의 근위병'처럼 당당히 걷는 것이다.











이제 다시 묻겠다.


당신이 만약 돈이 없고 굶주려 있다면, 음식을 훔칠 것인가? 굶주릴 것인가? 국가적으로는 이를 허용해야 한다. 가난함에 있어 소유권을 쥐고 있는 국가측에서는 '국민을 위함'에 존재하는 '수단'이라는 점에 나는 한 표를 둔다. 즉 양주의 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유 재산을 주고 그렇지 않다면 먹을 것을 생산해 주어야 한다. 단. 그 먹을 것은 절대. '부채'로써 요구되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국가가 빚을 지게 하면서 먹을 것을 준다면, 그것은 '양아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다. 나는 '죽고 싶다' 혹은 '죽음'을 생각할 수록 (역으로) 그 '죽음'과 멀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가슴이 만들어지는 듯한 결의'를 생각하게 되었다. 반대로 '죽음'을 멀리 떨어져 놓고 산다면, 내 스스로가 '죽음'을 오히려 두려워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자주 생각한다. 죽어버린다는 정신으로 견딘다. 어떤 찌릿한 상처나 비판과 협박과 뒷통수 때리는 일들에도, '죽음'을 자꾸 떠올리면 그것에 대해 사유하고, 완전한 삶으로 이어지도록 우리는 단단해 질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의아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일 수록 역으로 '절대 죽지 않을 사람'임을 확실하다. 자살하는 사람은 '신호'를 보내지 입으로 직접적으로 '자살''죽음'을 설파하듯 쏟아내지 않는다. 그러니 양주의 정신은 아주 강한 것이다. 이기적인 만큼. 그것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동시에 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작은 실천이 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위태로운 성에 들어가지 않고 군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의롭게 여겨서 천하의 큰 이익 때문에 정강이에 난 털 하나라도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의 군주들은 그를 따르고 예우하며 그의 지혜를 귀하게 여기고 그의 행동을 높이면서 외물을 가볍게 여기고 삶을 중시하는 선비라고 생각한다. 대저 윗사람이 좋은 땅과 커다란 집을 진열하고 작록을 베푸는 것은 백성들의 목숨과 바꾸기 위해서다. 지금 윗사람이 외물을 가볍게 여기고 삶을 중시하는 선비를 존중하면서도 백성들이 목숨을 던지면서 윗사람의 일을 위해 죽는 것을 중하게 여기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한비자韓非子』「현학顯學」











이쯤 되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양주의 삶처럼 '국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으로써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묵주의 삶처럼 '자신'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를 온전히 내보이며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두 훌륭한 인문학자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기초로 가고 '국가'에 대한 위(爲)와 위아(爲我)를 펼쳤다는 점에서 거장하다고 느껴진다. 사랑의 강요한다는 '폭력'이다. 아무리 누가 누구를 좋아해서 겸애하고 희생한들, 타인에게 조잡하게 느껴지고 불편함을 준다면 이것은 '폭력'이다. 라고 펼치는 양주의 정신은 어쩌면 나는 '묵주'적이기 보다 '양주'적인 가치관을 선호한다. 





여러분들은 묵주적인 사랑을 원하는가. 양주적인 사랑을 옳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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