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zue Oct 06. 2022

조직에서 유령취급 당했을 때, 한 사람은 망가진다.

나는 오로지 혼자였다 -『장자』와『프로이트』『키에르 케오르』의 철학 사유








직장 생활에서 유령취급을 받은 적이 있다. 왠지 내가 없어도 이 조직은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어떤 일을 많이 맡겨도 그 일에 대해 열심히 한 만큼 성과를 말해주지 않고 지시만 내리는 경우. 직장 상사가 혼자 겉돌듯 직원에 대우해 주는 듯 궁금한 척, 관심있는 척, 애정있는 척 하는 느낌을 주지만 정작 본인은 그 서열의 틈에서 조차 끼지 못할 때가 있다.








01. 사람들은 어떤 조직에서나 '존재감'을 받지 못하면 폭력성은 '나'그리고 '타인'으로 간다.


공자는 인과 서를 내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仁(인) 은 차별적 사랑이며 恕(서)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이 원칙에서 仁(인) 은은 묵자의 겸애(보편적으로 모든 이를 사랑하라)와 같은 이치라면, 恕(서)는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공격한다. 


어쩌면 직장에서 직원들이 나에게 유령취급을 했을 때는 '나'와는 다른 입장과 위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가 거리를 두고 원칙대로 가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직장에서 유령이 된 입장'은 자유로운 역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프고 예민한 입장이다. 만약 한 인간이 이러한 취급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끔찍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높이 평가 받고 싶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무엇 때문에 요사이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장주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외부로 드러나는 것(形)만을 지켰지 나 자신(身)을 잊고 있었다. 나는 혼탁한 물로 비추어 보았을 뿐 맑은 연못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다른 풍속에 들어가서는, 그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내가 조릉에서 놀고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잊었다. 이상한 까치가 나의 이마를 스치고 날아갈 때 나는 밤나무 숲을 헤매면서 나의 생명을 잊었고, 밤나무 숲의 사냥터지기는 나를 범죄자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장자』「산목(山木)」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도 같은 취급을 받는 다면 사람은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끔찍한 동물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장과 들어맞지 않으면 소리를 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말만큼 스스로가 행동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인문학자를 , 그리고 사람을 보는 데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 하느냐'가 관건이다. 어쩌면 되돌아가 '남과 나의 욕망이 다르다'는 것에 관련하여  恕(서)를 주장하는 공자의 입장은 냉정한 해석을 수반한다. 결국 자신이 원하거나 맞지 않으면 배척하고 폭력적으로 대할 여분을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가 이해받지 못할 상황에 늘 놓이는 것. 즉 '소통'은 엄청 어렵다는 결론에도 도달한다.

장자는 그래서 말했다. 


 " 恕(서)(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중요성) 을 뛰어 넘어서야 한다. "









02. 타자와 분리 시켜라. 조직생활에서 '차이와 반복'을 생각한다면, 개별적으로 행동하라.


그렇다. 바보와 또라이 같은 사람들은 도처에 있었다. 어떤 집단에서 타인의 말에 수용하려는 제스처가 없이는 사회 생활은 쉽지 않다. 과거 송나라 시대에서 어리석은 귀족들이 많았고, 귀족의 관리직을 비판하던 장자는 그의 후학와 함께 글을 집필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사기(史記)』「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이다. 장자는 당시 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쓰는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드러나서 명예를 얻지 못하더라도 주장과 말을 적어내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들은 등단하지 못하거나 유명하지 못하다면 '일종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장주는 웃으면서 초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천금은 큰 이익이고 귀족과 재상이란 지위는 존귀한 자리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도시 밖의 예식에서 희생으로 쓰인 소를 본적이 없는가? 수 년 동안 배불리 먹인 후에, 그 소에게 무늬가 있는 옷을 입히고 조상의 묘로 끌고 간다. 그 순간에 그 소가 자신이 단지 버려진 송아지이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즉시 나가라. 나를 더럽히지 마라.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 평생토록 나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나의 뜻을 유쾌하게 할 것이다.”『사기(史記)』「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




별을 돌보듯 하고, 개미나 땅강아지 같은 짐승들에게 먹힐 인간들은 왜 서열을 나누고 자신의 주장이 무조건 올다고 편견과 구분을 가지고 평생을 사는 가. 이러한 말을 한 장자의 후세들이었다. 나는 이러한 장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죽은 후세의 말들이 현실에서 적용될 리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는 조용히 죽는 편이 낫듯, 산다는 것에 당신이 '어떤 직장이나 학교에서 혹은 가족들사이에 유령취급을 받는 다면 어쩌면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쓸데 없이 이래라 저래라 떠들고 집단들끼리 뭉쳐 하는 말들은 대게 쓸모없는 말과 행동이라는 결론에 해당한다. 




출처 : 네이버 책




출처 : 네이버 책



우리는 지옥같은 현실에 놓여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내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성공한 위인이라고 나는 말'하고 당신을 인정해줄것이다.



하루를 정직하고 열심히 산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 이를 프로이트가 주장했고, 장자에서는 몽각 (夢覺)이다. 꿈에서 깬다는 뜻을 가진 한자단어다. 꿈에서 깨어난 다는 것. 유아론적인 입장에서 깨어난다는 것. 내가 직장에서 유령취급 받는 순간, 상대방의 눈과 행동을 제대로 본다는 것. 그 회사의 속내를 '내 입장에서가 아닌 내 생각을 빼고 자각에 이르러 제대로 본다'는 점. 그러한 생각을 한다면 조금 더 직장생활에 대해 받아 들이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을 굳건히 세우고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이 사람으로써 쪽팔리게 만들고 자긍심을 붕괴시키는 직장에서는 말을 해야 한다. 지인중에 한명이 여자에게 커피타라는 지시를 시키고,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고 한다. 당연히 수치심을 느낄 최악을 겪은 것이다. 그럴때 느끼는 것이 '인간의 자존심과 자긍심'이며, 인간에게 주어서는 안되는 '수치심'이다. 이렇게 어떤 사람을 쪽팔림과 모멸감을 주는 사람은 타인을 빌딩 아래까지 떨어트리게 만들 수 있고, 피해를 입은 인간은 결코 원한을 잊지 않고 갚을 준비를 할 것이다. 


수치심. 망각한채 살아간다면 '수치심을 주는 나쁘고 유령취급하고 함부로 대하는 상사얼굴에 타오라 시킨 커피를 면상에 뿌리고 때려쳐라'라고 말해주고만 싶다. 인간적이지 않다고 보는가? 인간은 어떤 모임에 직장에 속해서 있는 모든 계급들은, 인간이 지어낸 것으로 적어도 서로간의 '수치심'만은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 기본을 몰라, 한 인간을 수치심느끼게 만들 행동과 따돌림을 시키고 사람을 죽게도 만든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비극'중 하나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집중'하며 진인의 삶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힘이 강한 자에게 '말'은 불필요 하지만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말'은 그 사람을 살게도, 죽게도 만든다. 그러니 약한 자들에게는 포용의 말을 해주어야 하며- 강한 자들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헤겔의 주장'과도 통용된다.



03. 좋은 사회와 직장은 한 개인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집단이다. 당신의 집단이 그러한가?



우리는 생계를 위해 돈을 번다. 취업을 위해 학교를 다닌다. 먹고 살기 팍팍해 가족들에게 얹혀 살 수도 있다. 그러한 삶은 '우리의 자긍심을 없애는 방향'이다. 자긍심을 가진 사람만이 '수치'를 겪는다. 군자의 말이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모두 '자긍심'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쪽팔림을 알고, 수치심을 느끼고, 꿈을 꾸며 머릿속에 문제들을 거미줄처럼 치고 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직장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자긍심도 버렸을 때 자살을 한다. 살 가치도, 수치심마저도 의미가 없어지니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 스스로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위로 해주는 사람만이 '자긍심의 희망'을 가진 사람일 테니,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라도, 부모의 고생과 친구의 고생과 동료의 아픔을 토닥여 주어야 할 것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스피노자, 루소, 니체등의 개인의 자유론을 주장한 철학자들과 달리 헤겔은 '개인의 자유'를 추상으로 접근하여 개인의 감정과 욕망은 결국 '공동체'에서 위협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유는 '주관적인 내면화'로 시작된다는 헤겔의 주장처럼, 우리는 주관적으로 내면화를 시키지 않는다면 헤겔의 주장에 입각해 개인의 자유는 훼손되어 진다고 말을 한다. 


이를 헤겔은 ''교양 Bildung"이라고 한다.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평가하라. 타인과의 접합접은 부딪히게 될 것이고 하지만 그 모순을 찾아내어 객관적인 이념은 서서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주장은 불행을 씨앗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논리로 보인다. 







여러분들은 '불행'과 '어려움'을 겪는 스님과 같은 수행자보다 더 대단한 위인이다. 결혼도 안하고 산사에 수행하는 스님보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책을 읽고 인문학적 고민을 하고, 작은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과 자신의 삶에서의 고뇌를 가지고 있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어떤 스님보다 더 훌륭한 위인 인 것이다. 



삶에 대해서 초연해지는 인간. 유령처럼 직장을 보내고 부모의 욕망과 사랑을 받지 못해 고립감을 자주 느끼는 당신 마저도 당신은 '주인'이다. 사람으로부터 실연을 겪는 모든 고통의 인간이 '자긍심'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긍지'이며, '부처'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권력 상태에서 persona(페르소나)를 쓰고 살 고 있다고 해도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필요에 따라 현명한 것이다. 당신의 삶에 고독이 따른다면 말이다. 




04. 인간이 특별해지는 데에는 '자신이 가치 없음을 알고 노력하는 것에 있다' 


진짜로 탁월한 사람들은 허술하다. 솔직하다. 어린애 같다. 위의 말의 임제 스님의 말이다. 자신이 우월하고, 자신의 말이 맞고 똑똑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치없음을 모르는 사람이며- 진짜로 가치가 있고 특별한 사람은 '허술하면 허술한대로 솔직하게 그리고 유치하게 드러나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비움'과 연결된다. 자신에 대한 모든 존재를 파산 시키면 회사에서 유령취급을 받더라도 자신의 비굴한 마음상태를 배우게 된다. 이는 '자살하는 이의 마음'과 다르다. 타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듯 타자와 관계에 있어서 '내가 필요함에 따라'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는 것. 그 마음에서 부터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비울 수 있고' 비로소 솔직해 짐으로써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다. 몸과 정신을 타인과 일치시키며 공동체적으로 사는 것보다 '유령처럼 소외당하고 있을 당신'은 더 멋있다. 이 말은 즉슨, '타인과 연결망'을 가지기 위해 '자신을 파괴'시키는 불가피한 조건과도 같다는 말이다. 









당신은 어느 직장에 가던 이렇게 누군가에게 포섭되어지기 위해 스스로를 죽여야 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일치시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당신이 타인과의 관계에 '선택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유령이 된 직장에서의 나'를 '선택권을 쥐고 있는 상태'이기도 한 것이니, 마음을 둘 이유도 없어 자유로운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되겠다. 자신이 혼자라고. 머저리 취급 받는다고. 그 직장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권'이지, '필요조건'이 아니다. 당신이 원해서 그 직장을 들어갔다기 보다 '그 일' '생계'를 위해 사는 경우가 크지 않은가?


그러니 유령취급 받는 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은 떠나 보낼 좋은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동화처럼 행복할 수 없다.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함께 함께 즐거운 사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글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어떤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건, 그건 필요 조건이 아닌 선택권이니- 자신을 비우고 그들을 떨어 트려라. 멈추라.' 이는 공자가 하고자 하는 원숭이의 조삼모사 사례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혼자여야 날 수 있다. 혼자여야 '앎'을 깨닫게 된다. 





"날개(선입견) 없이 난다" 


목숨을 건 비약이 당신의 삶에서 시작되었다. 키에르 케오르의 말이다. 신은 비약이다. 그것이 신이든, 직장이든 당신이 하거나 말거나이다. 절대 조건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당신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유령이 되었다면 '선입견 없이 끊기도 맺기도 할 수 있다' 지금 있는 직장이나 가정생활은 '짐'이기도 하다. 현실은 비극에 가깝기 때문이다. 삶은 디즈니 랜드가 아닌 팀버튼의 동화에 더 근접하다. 그러니 그 비극속에 유령이 된 당신에게 선택권을 쥐고 스스로 강단있게 행동하고, 타인에게 포섭되기 보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떳떳히 한 걸음 한 걸음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제 장자처럼 날개 없이 자신의 선택권을 뚫을 준비가 되었는가? 당신은 유령이라 더 자유롭게 하늘에 띄워 날아갈 수 있겠다. 

날개 없이 날자. 당신은 키에로케오르, 장자의 말처럼 날개 없이 돌아오지 않을 이 비극의 인생에서 당신은 유령처럼 '쿨하게' 개인적 사유와 선택권을 지닌 채 날아 오를 것이다. 응원하겠다. 독자들이여. 노스텔지어를 바라지 말고 부담가지지 말고, 자유롭게 걷고 선택하고 버리고 이어가라.

당신은 유령이며 영원한 주인이다. 






작가의 이전글 '개인주의' 위한 당신의 욕망, 자유 경계선을 지켜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