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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Oct 07. 2022

우리는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봐야한다.

『비트겐슈타인과 불교』『나가르주나의 중론』- 나의 힘과 능력을 키우려면?








사람은 절대적인 위기와 자신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무거움의 경죄를 아는 순간 입맛을 느끼지 못한다. 살고 싶지 않은 아니 욕구가 바닥이 떨어진 사람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가 있다. 방황의 상태인 것이다. 그 상태일 때 나는 보았던 것 같다.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치의 힘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공(空) emptimess / sunyata (색안경을 벗고 사실 그대로 내 삶을 보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자체가 그 뜻을 똑같이 표현하는 건 아니다. 조금은 비트겐 슈타인의 말처럼, 기독에서 말하는'겨자씨' 와는 반대의 말이다. 약간의 회의주의적이고 염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사상으로 느껴지겠지만,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아는 것.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나의 아픈 과거와 현실에 도처한 상처들을 즉시한다는 것. 그것으로 부터 비트겐슈타인과 불교는 일치한다.










출처 : 네이버 책 




『비트겐슈타인과 불교 』 - 어느 것이 나의 힘과 능력을 발전시키는 가?


"그 사람이 문을 당겨야 열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 문밖을 나갈 수 없다." 

"이 세계는 있는 그대로 주어져 있다. 당신이 가진 문제는 '바로 당신'에게 있다."




우리는 진실을 보는가? 사람들과 있으면서 타인이 주는 거짓된 상처를 곪게 만들 때. 우리는 겨자씨 처럼 보호해줄 누군가를 찾거나 색안경을 쓰고 다른 시선으로 상처를 내버려둔 채 떠나버리려고도 한다. 우리는 진실을 알면서도 진실에 마주해 싸우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러한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려 지켜주고, 몽상적으로 그것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서양의 기독교적 사상'과도 같다. 마음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여럿 몽상적인 유럽의 드라마나 영화의 표현법을 보아도 그렇다.



때때로 고통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인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을 간파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01. 우리는 타인을 절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포용할 수도 없다. 그것은 나의 투사에 불과하다.



가족이라고 해도,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타인이 아프면 동시에 자신이 그 고통을 느끼려고도 애쓴다. 그런 사람이 점점 줄어 들고 있는 21세기 시대에, 대승불교에 나오는 것처럼 - 타인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음에도 자신의 고통인것처럼 옆에 있어주거나 말을 걸어 주는 사람들은 굉장히 고마운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고통을 마주해 보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처럼 말이다.




한국은 '다종교'이다. 그 중에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강하게 성장한 나라이다. 다른 나라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하고 시선을 끌고 올 수 있는 이유라면, 비주류인 듯 느껴지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고 정직하게 지켜나가고자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보다 인문책 번역이 출중한 편이다. 연구서보다 원전부터 번역이 많은 나라는 한국보다 우월한 국가는 없다.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주인공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건넨다. 빨간 약은 끔찍하고 불쾌한 현실을 마주하며 만드는 약이며, 파란 약은 이상적이며 질서와 체계가 짜여져 있는 안정적인 세계를 만드는 약이다. 우리는 빨간약을 먹어야 한다. 어쩌면 워쇼스키 감독이 영화 <매트릭스>영화에서 말하는 결정적인 말은 이것이 아닐까. 파란약(구원자를 찾아 이상적으로 삶을 묘사시키는 색안경)을 빼고 빨간약(절벽에 떨어지더라도 현실을 마주하는 현실세계)에 나와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출처 : 모피어스 (매트릭스의 빨간약) - 나무위키 자료 발췌
















02. 우리는 결국 전부 고통을 끌고 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 가야만 하는 것이 삶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감내하고 같이 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힘은 자신으로 부터 시작된다. 내가 힘을 가지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걸어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을 때 혼자 서서 가야 한다. 순간적으로 누군가를 교화하거나 같이 끌고 가려는 것은 타인에게는 위협이며 가끔은 자신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고통까지 감내하려다가, 스스로마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본적인 고통은 '자기의 힘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우리는 판타지를 조작하는 그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 진짜 중요한 문제는 생각과 앎이다. 제대로 아는 문제는 이해가 아닌 '의지'의 문제다."라고 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라캉이 '무죄의 의지'를 말했듯 말이다. 










인디언족들은 이름이 잘 바뀐다. 의미심장한 것이다. 인디언 출신 미국 작가 스콧 모마데이의 자전 소설중 '이름들'이라는 책에서는 인디언 족들의 키오와족으로 부터 오는 소수 민족의 특유 이름들을 알려준다. 짐승이나 눈에 잡히는 물건들과 같은 자연스러운 물질들의 이름을 삽해 토속언어를 만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인디언 언어의 아름다움처럼,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변화해 가는 자연스러운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또 '고통'을 불현듯 마주하게 되며, 인디언의 수시로 바뀌는 독특한 이름처럼 처세술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름의 고유명사' 즉, 변화하지 않는 어떠한 집착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색안경벗기')로 변화하듯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서 가야만 하며, 그렇다면 부재는 줄어들고, 변화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상실감과 타인에 대한 결여를 내려놓고 우직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11. 인연으로 생겨난[衆因緣生, pratitya-samutpada] 모든 것을 우리는 공[空, sunyata]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임시로 시설된 것[假名, prajnapti]으로 이것은 또한 중도[中道, madhyama pratipat]이다.


12. 어떤 것이든 연기적으로 성립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공하지 않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3. 만일 이 모두가 공이 아니라면 [무엇이] 생겨나는 일도 없고, 소멸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네 가지 진리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 나가르주나, 『중론




  






03. 너무나 좋은 사람일 수록 자신의 평범함을 드러내고, 겸손한 모습이 태도와 말에서 드러난다.



냉혹한 삶이다. 하지만 이 순간 피어나는 별만큼 피는 꽃이 아주 아름다운 것이다. 식물중에 '난'은 물을 주지 않을 수록 잘 키운다. 고통의 극한 속에 자라난 꽃의 향. 난초꽃의 향은 아주 매혹적이다. 꽃들은 과잉보호와 방치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핀다는 사실을.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자식을 키울때 하물며 어떤 동물을 키울 때도 그렇다. 너무나 과하게 대하고 사랑을 주면 죽어버리고, 너무 멀리 떨어트려 놓아도 죽어버린다. 그 중간에 우리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불교의 『나가르주나』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면. 아래와 같다.



나가르주나는 남인도의 바라문 계급 출신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바라문들이 베다를 낭송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그 문장을 암송하고 뜻을 이해했을 정도였다. 젊은 나이에 이미 다방면에 재능을 나타내었는데, 세상의 깊은 진리를 통달했다고 생각한 그는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고자 은신술을 익히게 된다. 은신술을 이요하여 네 사람은 왕궁에 들어가 궁중의 미녀들을 모두 범했다. 몇 달 후 후궁 가운데 임신한 사람이 생기자 왕은 범인을 잡을 것을 명령했다. 마침 지혜로운 신하가 있어 침입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으나 나가르주나만은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가르주나는 비로소 욕망이 고통의 근원이며 재앙의 뿌리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출가하였다. … (중략) … 남인도로 돌아온 나가르주나는 외도를 복종시키고 크게 대승의 불법을 폈다. 여러 차례의 논쟁을 통해 많은 왕공과 장자, 브라만들을 불교에 귀의시켰다. 소승불교의 한 법사가 나가르주나에게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르주나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까?” 소승법사는 그의 장수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자 나가르주나는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며칠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매미가 허물을 벗은 듯이 죽어 있었다. 나가르주나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지났는데 남인도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위해 묘를 짓고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며 섬기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아르주나라는 나무 아래에서 그를 낳았으므로 아르주나라고 하며, 용이 그의 도를 완성시켰으므로 나가[龍]라고 이름 지었다. 이리하여 그의 이름이 나가르주나가 된 것이다.












사람은 늙는다. 자신의 추한 얼굴과 마음을 본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인다. 그러한 소박함의 힘. 단순함의 아름다움은 별나 보이지만 스스로에게도 집착을 버리게 만들고, 타인에 대한 쓸대없는 왜곡된 세상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04. 우리는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발화'하는 것이다. 찰나 찰나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인속에' 결과가 있다. 인과관계이다. 결과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불변하는 상태의 인간인 것이다. 전자의 경우 변화하면서 가기 때문에 극단으로 간다면 회의주의자처럼 느껴지게도 된다. '내가 오늘은 이것을 좋아하지만, 내일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달라질 수도 있다. 어떤 것도 불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다 변화하기 때문에 의지할 곳에 믿을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 두가지의 이론 사이 존재하는 '중도'의 관계는 무엇인가?






바로 자기가 존재하고, 어떤 사건을 만나고, 내가 어떤 상태이고 어떤 과거의 경험과 어떤 찰나적인 일들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부정하거나, 긍정하거나 둘다 사람을 파괴시킨다. 그러니 우리는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발화'하는 상태인 것이다. 마치 사랑처럼말이다. 나는 과거 어떤 사람과 사랑했다. 헤어진 이후 그 사람과 헤어졌다고 그 마음이 영원히 슬픔으로 남는가? 혹은 급작스럽게 그 사람을 잊게 되는가?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성그대로'말이다. 서서히 달라지고 불현듯 나타나다 또 조금씩 흩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변화'가 아닌, '발화'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찰나 찰나 변화하듯. 어쩌면 내 스스로가 보기 싫은 찌질하고 끔찍한 면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해해줘야 한다. 그것이 삶이고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불변하거나 급작스럽게 변화하며 살아가는 것은 없다. 양위진론사이에 있다. 그러니 이 글에서 총체적으로 당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당신이 처한 어떠한 어려운 상황'도 변화할 것이며, 당신의 '바램'이 있다면 당신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발화'해 이루게 될 것이라는 100%보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정 정도의 '페르소나 인격'을 갖추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발화'의 작은 틈을 말하기도 한다. 



 



페르소나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했다.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페르소나는 종종 영화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르소나 [persona] (영화사전, 2004. 9. 30., propaganda)













14. 사물에 자성이 있다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이 없고[不生不滅], 변화와 다양성도 없을 것이다.


15. 위대한 성인이 공의 진리를 이야기한 것은 갖가지 견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만일 공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다면 어떤 부처도 그런 자를 교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나가르주나, 『중론






'좋은 길의 여인'이라는 뜻의 쿠 와스 테 윈 can-ku was-te win





글을 마무리하며, 쓴다. 우리는 색안경을 벗고 나의 날것을 봐야 한다. 자신의 이름 '고유명사'에만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비루하고 늙어가는 얼굴 혹은 생기 없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자. 그리고 자신이 조금씩 변화할 수 있도록 마치 인디언들의 이름처럼 '지혜롭고 생동감있게 발화하듯' 바꿔나가자. 










이번 칼럼은 어렵게 느껴질 지 모르겠다. 나가르주나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사상가중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완전한 '변화'도 할수 없고 '불변'할 수도 없는 나 자신이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모습' 나 자체를 긍정하는 것 ! 그것이 '색안경을 벗고 삶을 행복하게 발전시켜나가는 시초'가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시길 바라며. 응원 드린다. :)





만약 당신의 이름은 '인디언식 이름'으로 지어본다면 어떨까?
 적절한 형용사와 부사 그리고 명사를 혼합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닌 내가 지은 이름 일종의 페르소나 같으면서도 스스로가 직.접. 결정지은 주체적인 인디언식 이름 말이다.
내일은 바뀌지 않아도 어떠한 상황으로 당신이 직접 지은 당신의 '인.디.언.식. 이.름'은 그렇게 변화할 것이고, 당신은 어제와는 다른 성장한 사람으로써 이름의 사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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