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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Oct 11. 2022

사자와 같은 시선으로, 불안함을 내려놓기

『왕충』으로 알아보는 내 삶의 불안함을 내려 놓을 수 있는 방법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를 부딪힌다. 친구와 스승과 부모와 낯선 누군가와 표면적으로 갈등을 겪게 되고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원하지 않는 결과로써 실망과 절망을 겪게 된다. 그 누구도 그러한 결과를 원한적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절망의 순간들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불안함'을 겪게 된다.



사람들은 불안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준비'를 한다. 과도한 준비는 어쩌면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한나라의 『왕충』이라는 책에서 동양철학 사상중 가장 우월하게 추구받는 이유는 지금 현대에 적용될 수 있는 이유 '불구대첩(不俱戴天)(운명)'을 부정하기 때문이며, '기우제'를 지내는 민중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저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운명이 없는 인연의 삶에 살기에 오히려 불안할 이유가 없다. 











1) 결국 우리의 '불안함'으로 생각이 멈춰서 있다는 것. 해결의 실마리는 스스로가 알고 있다. 


기우제를 지내는 사람들을 부정한 왕충은 말한다. '언젠가 비가 온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이를 알면서도 비가 오지 않아 불안한 민중처럼 불안에 떨게 된다.


어떤 사건에 대하여 고민을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음에, 그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용기가 부족해서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몸이 어디가 안좋아 병원에 간다고 치자. 그럴때 당신이 병원에 가는 길에 당신이 넘어지거나 길을 잃거나 재수없게 누군가에 의해 더 큰 해를 입는 다고 치자. 이러한 일들이 어떤 인과관계에 의해 생겼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건은 '필연적'이 아니다. 필연적은 '사주나타로'같은 운명을 믿는 사상을 말하나, 모든 사건은 '우발성'이다. 어떤 사건이 분명이 운명적으로 일어나거나 인연이 되어 생기는 일이 없기 때문에, 당신에게 일어난 사건사고에 대한 모든 일들이 '당신 탓'이 아니며, 당신은 그 사건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음도 말해주는 것이다. (필연성과 반대이기 때문에 인과관계도 부정되기 때문이다.)











2) 사랑에 대해서 '필연적'이라고 여기는 '낭만'의 끌고 가려는 사람의 본능. 이별을 더 괴롭게 만든다.


모든 사건은 '우발성'이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겪는 모든 사건을 '현상'이라고 말한다. 과거에서부터 옛날 논리로 보자면, 동성동본이 문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관념속에 같은 성 씨를 가진 사람들끼리 결혼을 해야 유전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는 다는 옛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규칙과 원칙으로 만들고 그것을 절대진리로 만들어서 '모든 사건을 우연이 아닌 인연, 필연'으로도 만드는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래의 왕충의 이야기와 『논형』를 살펴보자.



"왕충도 근본적으로 협객이었지만, 무(武)의 협객이 아니라 문(文)의 협객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분명 왕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협객으로서 당당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기반이 없는 그들의 의협심은 자신들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왕충이 관료로 임용되려고 노력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부정의와 맞서려는 자신의 뜻을 효과적으로 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고위직에 오르려는 왕충의 뜻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지방 관료로 있을 때 왕충은 민중들의 궁핍한 삶을 개선하려고 수차례 태수에게 진언하지만 그의 생각은 채택되지 않는다. AD 76년 왕충은 그의 나이 51세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게 된다. 그는 정치권력을 넘어서 부정의하고 부조리한 인간의 사유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데 자신의 남은 힘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치열했던 그의 사유 흔적은 지금 『논형(論衡)』이란 방대한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학자들은 하늘과 땅이 ‘의도를 가지고[故]’ 인간을 낳았다고 하지만, 이 말은 허황된 것이다. 대체로 하늘과 땅이 기(氣)를 합할 때, 인간은 ‘우발적으로[偶]’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부부가 기를 합할 때 자녀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부가 기를 합하는 것은 당시에 자녀를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욕이 발동하여 합한 것이며 합한 결과 자녀를 낳은 것이다. 부부가 ‘의도를 가지고’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하늘과 땅이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낳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대체로 하늘이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낳을 수 없다면, 하늘이 만물을 낳은 것 역시 ‘의도를 가지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기를 합하면 만물이 ‘우발적으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논형』「물세(物勢)」











3) 나쁜 사람이라고 죄를 받고 좋은 사람은 복을 받는 '권선징악'은 불행하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스스로를 많이 자책할 때가 있었다. 내가 준비를 덜해서 회사에 짤렸을까. 내가 행동이 더 적극적이지 못해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 .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렇게 회사에서 짤리고 학교 생활에서 따돌림을 잠시 당했을 때도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발에 밟힌 개미는 '그럴 운명'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그냥 밟힌 것이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그대로 가자. 실망할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정신이 바로 '왕충'이 말하고자 했던 정신과도 같았다. 누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어떤 안좋은 일을 겪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내 문제'였다면 나는 언제든 정직하게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나의 노력과 눈물과 시련과는 달리. 세상은 너무나 잘 돌아간다. 그걸 받아 들여야 한다.


마치 이성복 시인이 말했듯 '너의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살고 보니 알았다. 노력만큼 오는 것이 전혀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초연'해졌다. 정확히는 초연하기 보다는 '노력을 하지만 오는 결과에 대한 불만'을 버려둘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들어 많은 사람들이 돈이 많고 유명해진 방송인이나 유튜버 혹은 저자나 많은 전문가들을 닮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한다. 심지어는 기도를 하고 절을 천배만배하고 시주도 한다. 


왕충의 입장에는 이러한 모든 행동이후에 오는 '한계' 즉 '비극적 정서'에 이르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도 포함한다. 슬프다. 왕충의 동양사상을 받아들이고 산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도 '결과'자체는 의지 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말이다.



 땅강아지와 개미가 땅 위를 기어갈 때 사람이 발로 밟고 지나간다. 발에 밟힌 땅강아지와 개미는 눌려 죽고, 발에 밟히지 않은 것은 다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남는다. 들풀에 불이 붙었을 때 마차가 지난 곳은 불이 붙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며 행초(幸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에 밟히지 않는 것, 불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라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우연히 불이 붙었고, 사람이 길을 가다가 때맞게 그렇게 된 것이다. (…) 거미가 줄을 쳐두면 날벌레가 지나가다 벗어나는 것도 있고 잡히는 것도 있다. 사냥꾼이 그물을 쳐놓으면 짐승들이 떼 지어 달리다가 잡히기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한다. 어부가 강이나 호수의 고기를 그물질하다 보면 잡히는 것도 있고 빠져나가는 것도 있다. 간교한 도적이 큰 죄를 지었어도 발각되지 않기도 하고 작은 죄를 돈으로 면제 받으려다가 발각되는 경우도 있다.-『논형』「행우(幸偶)」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지각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개별자들로 검증해보다면 사람은 죽어서 귀신이 되지 않고 지각도 없어서 사람을 해칠 수가 없다. 무엇으로 그것을 검증할 수 있을까? 동물로 검증하면 된다. 사람도 개별자고 동물도 또한 개별자이다. 동물은 죽어서 귀신이 되지 않는데, 사람만이 죽어서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정기(精氣)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정기는 소멸한다. 정기가 되는 것은 혈맥이다. 사람이 죽으면 혈맥이 마르고, 혈맥이 마르면 정기가 소멸하며, 정기가 소멸하면 육체가 썩고, 육체가 썩으면 재와 같은 흙이 된다. 어찌 귀신이 되겠는가?『논형』「논사(論死)」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걸어가야 한다. 당신을 둘러싼 '우발적'인 모든 상황에도 말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들은 뒤돌아 보지 않게 된다. 당신이 어떤 위치에 있건 알바를 하거나 돈이 없어 빚이 있거나 인간관계에서 미움을 받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한 자는 '결과'에 대해 초연해지고, 오히려 자신이 할 영역과 나아갈 부분에 대한 경계성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얼마나 멋있나. 나는 그런 사람만큼 멋있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한계에 직면하는 사람말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결과'보다 그 사람이 겪은 '한계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한계에 직면해서 보는 자신의 상황과 모든 극한 상황을 통해 '나를 알게 되고 나의 경계선'을 알게 된다.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겪은 '끔찍한 경험' 그 이후.. 우리는 그 경험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의 경계선을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게 된다.











여기까지 인 것이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한계까지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언젠가 한번씩은 자신의 삶에서의 '바닥'을 드러날때까지 노력을 해봐야 할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한계를 보게'되고, 그로부터 오는 현재에서 최선을 다해 지.혜. 롭. 게 살게 된다고도 본다.









당신이 삶에 '필연성'을 믿는사람인지, '우발성'을 믿는 사람인지 질문을 던져 본다.

왕충은 후자를 말한다. 모든 만남은 '인연'이 아니라,'우연'이며 - '해자정리'라는 말처럼 만나면 헤어지는 간단한 물리적 움직임인 것이다.

그러니 삶에 대한 무거운 과중을 스스로에게 돌일 필요가 없으니 불안함을 느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당신이 갇힌 '감옥과도 같은 현실'속에서도 우발적으로 다가올 어떤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주친다[遇]’는 것은, 능력을 미리 닦아 두는 것도 아니고 유세할 내용을 미리 갖추어 두는 것도 아니지만 군주의 마음에 우연히 맞게 되기 때문에, ‘마주친다’고 한 것이다. 만약 군주의 마음을 헤아려 유세할 내용을 조절하여 존귀한 지위를 얻었다면, 이것은 ‘잰다[瑞]’라고 하지, ‘마주친다’고 하지는 않는다. 봄에 종자를 심고 곡식이 자라나면 가을에 수확하여 곡식을 거두는 경우나, 어떤 것을 구해서 그것을 얻고 일을 해서 그것이 완수되는 경우는 ‘마주친다’고 하지 않는다. 구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이르고 하지 않았는데도 일이 저절로 완수되어야 ‘마주친다’고 이야기한다. (…) 지금 세상 사람들은 이미 ‘마주친다’와 ‘마주치지 않는다’라는 논의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데도, ‘마주친’ 경우에 대해 그것을 칭송하고 ‘마주치지 않은’ 경우에 대해 그것을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드러난 결과에 근거한 것이며 이미 이루어진 일을 판단한 것이지, 이것으로는 그 사람의 행실과 재능을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다.『논형』「봉우(逢遇)」




무언가를 많이 짊어진다고 안전해질까? 가볍게 걸어가서 가는 길에 만나고 얻게 되는 것들을 껴안는 삶. 그리고 만나서 헤어지는 '우연'들에 대해 미련없이 한계를 껴안고 보내주는 것. 바로 '나 자신을 아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하고싶은 꿈에 대한 준비를 하자. 결과에는 오히려 처연해 질 것이고 담대해 질 것이다. 






#목적론 #필연성 #우발성 #고(故) #우(遇) #행(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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