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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Oct 13. 2022

찌질하고 나약한 삶도 동화같은 세계처럼 활짝 펼쳐라

이탁오 『분서(철학서)』니체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명나라때 가장 많이 발달한 업이 바로 '출판업'이었다.


베스트셀러가 있었던 그 당시의 촉망받던 작가가 '이탁오'의 저서.

『분서(철학서)』 『장서(역사서)』 이 두 책이었고,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문체에 영향을 준) 작품이 『열하일기』이다.



책 소개 및 추천



(1)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과 같이 우리가 꼭 한권 씩은 소지하기 되는 책 !


그러다 보니 많은 저자들이 박지원의 문체를 다 따라하다보니 복제식 책들이 많았다.

(이수광 박지원 정다산 등의 사상가, 서민대중에 파고 든 『삼국지』 와 『수호전』 등)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독약을 먹은 것처럼 문단에 있어 '유교적이고 보수적인'사상을

깨기 위한 어떠한 탄합이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여자와 노예는 물론 창녀들도 청학공동체로써 가르침을 받았었다.


사회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 76세의 나이에 자살을 하는 이탁오의 모습. 소크라테스와 닮은.

그래서 이탁오의 분서는 개항적 초기 작품으로 연구서아니 원서라도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맑은 아침 대머리 늙은이가 책 태워도

그 도는 아직도 다 타지 않고 남아 있네.

저 불교와 이 유학은 깨달음이 한가진데,

인간의 세상은 멋대로 떠들어서 시끄럽네.

문선왕 나를 맞아 귀한 손 대접하니,

기린 봉황 높이 나와 친히 보니 기분 좋네.

나의 인물론을 늦도록 읽어주니,

이제야 선현의 책 그 사람을 알겠네.

노자는 나기 전에 아는 것이 많았고,

평생에 참선에 듦이 큰 기쁨이네.

글은 이뤘어도 아직 진의 분서 없어

대간의 탄핵 세 번 마음은 상쾌하네.

ㅡ 《을병조천록》 이씨의 분서를 읽음


*나무위키의 실린 《을병조천록》 이씨의 분서 내용 발췌






네이버 영화 '아임낫 히스레저' 사진 발췌




영화 다크나이트 에서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The night is darkest just before the dawn 

새벽(해뜨는 시각) 직전의 밤이 가장 어둡다.








(2) 우리가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로 시작할 때 '미래는 서서히 밝아진다.'

이 말을, 실질적으로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과양의조화'즉'주역의 조화'이다.

정확한 의역인지 모르겠지만 옛날 동양주역(중국고전)에서

태극기 음양오행론 즉 음과 양을 볼때도 해당되는 말이다.





 ‘태극기’(太極旗).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와 비슷하다.

4괘(四卦)에서 건(하늘☰), 땅(곤☷), 음과 양이 섞인 조화 (☵☲)

그러니까 가장 어둡고 추운 '동짓날'에서 '복괘'가 시작된다는 말처럼

복괘(一)에서 시작해 (☷)로 올라간다는 말처럼 중국 고전에서 주 핵심인 것이다.









서양으로 넘어와 이것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에서처럼

한 사람이 주인으로 넘어온 과정은 결국 '어려움'을 견디고 '자유'로 가는 과정이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한 주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동심'을 얻어 살게 된다.










이탁오의 '분서'는 결국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리고 '음양오행'은

같은 말로써 통행된다.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달라지는 것. 예술가와 같다.

여러분들도, 한 명의 예술가로써 스스로의 개성을 표현하고 내가 만든 삶으로

걸어 나갈 수 있어야 겠다. 유학자들은 '자신의 글''자기의 이름'으로 쓰기를 꺼렸다.

유학자들의 서신 교환 시짓기들은 헛된것인 것이다. 이탁오의 분서처럼 살아가자!







(3) 과연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존재하는 것일까?


남이 보는 세계. 내가 보는 세계. 각자가 여는 세계가 있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삶이 닫히면 세상은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사실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욕망 그리고 외로움일 수 있겠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내 세계, 내 감정, 내가 생각한 것이 있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공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도 보여주는 것.






(4) 이러한 경계선때문에 '프리드리히 니체'는 고통을 느끼며 미쳐갔다고 했다.


니체의 책을 살펴보면 '개인주의의 마지막 단계'이자, 불교적 색채와도 닮았다.

사랑도 사실은 내가 의미부여하고 내가 사랑해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니까.

결국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마무리짓는 것도 '자신'이어야 겠다. 허무하지만.



그래서 나는 당신이 느끼는 '동심의 세계'를 좋아한다. 모든 건 가상이기도 하니까.


각자 각자 어울리는 삶에 맞춰서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짓고 표현하고 타인을 따라하지 말자.

자기 세계. 참 좋은 말이다. 몽상적이고 개인적이고 그러면서도 타인의 삶에 맞물려 가지 않는.

그러한 기품이라면. 나의 이 찌질하고 나약한 삶도. 문학화시켜 잘 살아갈 수 있겠다.



다들, 그렇게 자신의 삶을 펼쳐서- 어떠한 억압의 폭력적인 말에도 굴복하지 말고 살길..

응원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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