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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Jan 04. 2023

당신이 '개인주의자'로 서는 것을 두려워 말길 바라며

한국 사회에서 도외시되는 개인의 자유와 폭력적인 집단문화에 벗어나는 사유







#1 폴라로이드



어린 시절, 가난해서 장난감을 제대로 가져 본적이 없다. 피카츄 인형. 그리고 쥬쥬라는 마른 인형. 이 두 장난감밖에 없었다. 할머니께서 뭘 갖고 싶냐고 물으셨다. 일곱살이었던 나는 말했다. "인형의 집이요!"



나는 그냥 한 말이었지만, 할머니는 늘 인형의 집을 사주지 못한 마음에 미안해 하셨다. "혜주야, 할머니가 돈이 없어서 인형의 집 못사줘서 미안해" 그 말이 슬펐다. 굳히 '돈이 없어서'라는 말을 하지 않으셔도, 할머니께서 당연하게 사주셔야 할 것도 아니었는데. 늘 나를 보면 미안해 하셨다.



어머니께서도 어릴 때 잘 해주지 못해 늘 내게 미안해 하신다. 초등학교때 동화책을 갖고 싶어했는데, 그 동화 책 한 권을 사주지 못한 기억들. 해리포터덕후인 내게 유일하게 선물로 주신 '해리포터 혼혈왕자'편 시리즈 선물이 기억이 났다.








과거, 아버지는 퇴근후 집으로 오시면 비디오 대여점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아버지와 나는 늘 서로 각자 좋아하는 영화 한 편씩을 골라 빌렸다. 아버지 영화는 액션물이 많았는데, 18세가 넘어도 아버지랑 같이 봤었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대화를 많이 했었다.



어머니와 친언니는 늘 바빠서 집에 없었고, 그래서 빈 집에 아버지와 같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드라이브를 다녔다. 어쩌면 어머니가 없는 빈 옆좌석에 내가 대신 한 건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어느 날 내게 말했다.



"혜주야, 내가 꼭 보여주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아버지는 육하원칙에서 대부분을 빠트리시고 하신다. 그럼 나는 '뭘?' 혹은 '어디?'라는 말을 굳히 하지 않는다. 그날도, 아버지 차를 타고 갔다.



날이 흐렸고, 거의 서너시간을 넘어 논밭만 보이는 곳에 아버지가 차를 세우셨는데, 사람이 다닐 수도 없는 험한 길로 혼자 걸어 가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따라오라는 말씀만 하신 채 무뚝뚝하게 혼자 걸어 가셨다. 당시 내 나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혼자서 그 험한 길을 아버지 등만 보고 걸어갔다. 산중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걷다 보니 아버지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어버지는 아주 큰 나무에 자신의 손바닥을 대고 계셨다.



그 당시에, 솔직히 많이 짜증이 났었다. 겨우 이 나무 한그루 보여줄려고 서너시간? 아니 그 이상을 왔던가.



"아빠. 나무가 크네. 집에 가자"



아버지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무만 보시더니 거칠한 기둥을 쓰다듬으시며 그 나무에 대해 뭔가 말을 하셨다. 대략 자신에 대한 어떤 추억을 말하셨는데, 흘겨 들어서 생각이 안 난다. 그때의 아버지 모습만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거기 머물러 오롯이 자신과 나무만 남은 것처럼 있으셨다.



그때 문득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뭐랄까? 아버지는 늘 쓸쓸해 보이셨다. 사랑하는 아내를 짝사랑하는 남자. 한 대상으로 보자면, 그랬다.






아버지는 올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오웰의 《1984》가 있다면 그 지배세계를 철저히 거부하고 떠도는 외로운 남성 같았다. 몸부림치며 살다보니, 똑같은 셔츠를 입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회사에 마치면 영화들을 나와 편집증적으로 같이 보고 혼자 드라이브를 가버리시거나, 방에 박혀 이상한 글을 쓰는 모습들이 선연하다...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간다.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나이는 45살이셨다. (솔직히 이 긴글을 누구도 읽지 않는 확신이 있어서 쓴다만, 디엠 오는 사람들은 내 사진들만 보고 온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셔도 마흔 다섯으로 남아 있고, 나는 아버지의 나이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 상태다. 그리운 사진을 이따금 본다. 가족으로써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시간의 총량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리움도 크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를 이해하면서도, 아버지의 사진들을 손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해선지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숨겨 두셨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떠날 때 조차 말없이 불현듯 가셨고, 가시는 순간조차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주. 너무나 자주 '아내를 사랑해' 라고 했으니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기엔 마음이 비좁아진다.



지금의 현실과 부모는 부부의 사랑으로 그쳐, 친언니와 나는 공통 분모로써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다만. 그렇다고 우리는 완전히 흩어질 수도 없었다. 오늘 아침도 어머니는 내게 사과를 하신다. 늘 해주지 못한 것들에 사과가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시고 계신듯 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가족들과 편해지려면 나는 방법이 없다.







#2. 푸른꽃



"만국의 개인주의자 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도 기차는 간다."







우리는 한국의 집단 주의 문화에서 느끼고 싶지 않은 감각과 생각들을 자주 침범당한다. 어른들은 대단한 인생을 살았다는 둥 자신의 철학을 설파한다. 하지만 떄론 그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왜 복잡하게 처리하지? 그리고 그런 체계를 어떻게 당연하게 지금껏 고수하지?"



다른 집단보다 출판 문화계가 좋은 것은 그들이 다른 집단들보다 문학적으로 사유할 시간이 많은 만큼 큰 리스크를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원고투고시 저자에게 부담되는 금액은 출판사마다 다르다. 하지만 책을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보내 다시 반송되어도 그 책임은 소비자가 아닌 출판사 측에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옛말로 시인들이 시집을 서로 사본다는 그 장난스러운 말이 장난이 아니기도 하다. 출판계시장은 많이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디지털 시대에 다양한 저자들과의 소통으로 또 NFT시대의 연결로써 장르문학이 다양화 되겠다. 그래서 지방의 출판사는 옛것의 문화를 고수하겠으며 점점더 이분화되어 갈 전망이 보인다.


출판사에 일하지 않아도, 소소한 글을 쓰는 사람들도, 꼭 작가가 되어야 할 이유또한 없으며- 나는 내가 태어난 것도 내 의사가 아니었고 죽어서도 어떤 훌륭한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목적도 없다.



근데 이런 일반적인 생각이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다. 이성과 같이 주고 받은 물건들이 있다. 그걸 이성 생각 없이 소유하고 들고 다닐 수 있는가?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너랑 차고 다닌 커플 시계를 결혼해서도 가지고 있을 수 있어."



"아니. 근데 그건 결혼할 상대에 대한 실례가 아니야? 버려야 한다고 봐"



그때 만났던 이성친구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모르진 않는다. 그만큼 나를 사랑한다는 말의 표현이겠으나 나는 사랑의 의욕이 과다 충전된 나머지 자신의 마음을 '대서특필'하듯 하는 그 대사가 아직까지도 석연치 않다.



물건은 낡아져서 오래 간직해도 괜찮겠고, 너무 시니컬하게 헤어지고 만나는 인연들도 안되겠지만.. 서로의 행복에서는 '그 행복이 골방에 그치지 않도록 함'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난 인연은 보내줘야 할 것이며 - 이는 물건에도 들어가기 마련이다.



특히 우정과 사랑은 다르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변절 되기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좀 다르다. 우정보다 사랑이, 한 대상을 노출 당하기 쉬운 관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늘 학창 시절에서 느끼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감히 작고 단순한 일로 죽비를 얻어 맞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귀는 이성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그 '미련'이라는 것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헤어짐을 당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다치는 건 같지만, 더 오래 기억이 남고 더 시리게 베이는 쪽은 (개인적으로) 우정보다 사랑이라고 본다.



그래서 혼자 인 것이 이상하다 느끼고, 혼자를 못 견뎌서 이성 친구를 사귀고자 사활을 건 사람들을 보면 놀랍다. '혼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마치 독서나 산책 혹은 밥벌이 처럼 응당히 겪어낼 일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임을 자처하지 못하고야 마는 사람' 들이 너무 많다. 불나방처럼 절벽에 뛰어 내리듯 사랑에 목 매면, 그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도취된 인간으로 남고 싶은 인간의 심리가 있다고 본다. 상대의 감정은 언중에도 없고 자신의 욕망표현에는 절절한 것. 어쩌면 그것은 어리숙한 태도라고 본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로 부터 나도 모르게 시시때때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인위적으로 빠지고 마는 다이빙 같은 사랑'은 담력 시험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럴 바엔 길가에 핀 예쁜 꽃 하나 보고 미소 짓는 게 더 '사랑스럽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사랑도 '인간관계'다. 서로 불안 초조해서 붙잡고 있는 관계. 그런 게 사랑이었다면 나는 아마 활자 중독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에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나와 다르다. 그는 그로써 존중 되어진 채 헤어져야 한다. 헤어지더라도 서로가 행복을 빌어 주어야 할 것이며, 다시 만났어도 미련없이 스쳐지나갈 줄 알아야 하는 것까지 .



그래야 새롭게 핀다. 새로운 사랑의 꽃






#3.북카페



스톡홀름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란 인질사건에서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인질범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자신들을 볼모로 잡은 범인들에게 호감과 지지를 나타내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성공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은 모두 일에 미쳐 있었다. 하지만 그 일에 광적인 만큼 인성이 바닥인 사람이 많다.



유명한 랩퍼 '스윙스'의 말씀처럼 어떠한 위인도 사생활을 파헤쳐보면 청렴결백한 위인은 없다는 그 말이 옳다고 본다. 이쯤에서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어떤 대상이 매혹적이라 존경할 수 있겠지만, 그의 비판받아야 마땅할 점마저 은폐하고 존경할 이윤 없다고 본다. 단점은 단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선망의 대상이 '진리'인양 따라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슬프다.




나의 큰 단점은 '열등감'이다. 늘 주변에서 '기죽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나는 주변을 많이 살피고, 비위에 벗어나려고 조용히 살고자 애쓰는 소립자이다.



조지오웰의 『1984』로 치자면, 나는 85퍼센트에 해당하는 노동자이며 가장 하단에 위치해 언제 죽임을 당할 지 모르는 약한 길냥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줄곧 '난 비겁하다'는 말을 정직하게 한다.



예를 들어, 길을 걷다 누군가 옷을 잡아 당기거나 욕을 하거나 혹은 장난전화를 당신에게 걸었다고 하자. 이것은 폭행에 해당하는 상해죄이며, 장난 전화의 경우 3번 이상 기록이 남고 피해자가 심신적으로 피해를 봤다면 신고시 처벌을 엄중히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빈번한 사고들에 노출될 사회에 매번 대항하고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늘 정직할 순 없다. 때에 따라 그렇게 나에게 상해를 물리적 접촉이나 말로써 입히는 자들에게 최선의 대책. (최고 x 최선 o) 은 대항하지 않는 것에 있다.



인간 내면은 상당히 복잡해서 우리가 너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면 최소한의 지켜져야 할 나의 밀실마저 헤집어질 위험이 있다. 그 밀실을 지키는 것을 국가나 경찰이 해주지 않는다. 아쉽게도 그들은 피곤해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광장속에 위험을 겪읐다면 최소한의 경계테세를 유지하자.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어떠한 양쪽도 대변할 수 있는 입장에 똑같이 놓인다. 만약 당신이 제대로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제 손에 피를 묻힐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 그래야 우리는 행복할 수도 있겠다. 어느 정도 비겁한 인간.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전문자의 도움이 아니라면 내가 아무리 힘을 가해도 무력하게 무너질 위험이 더 크다는 현실..




피 튀기는 경쟁이 가장 심한 도심. 서울의 공간에서는 '히스테리'보다 '강박'이나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고 사례된다. 사람들은 다 다르다.



주변에 기준에 어긋난 사람들이 돌연변이 인간들이 꼭 있다. 직원들 앞에서 욕을 아무렇지 않게 퍼붓고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에게는 숙이면서 아랫 지원들은 쉽게 폄하하고, 틈만 나면 대화가 아닌 작은 물리적인 행위로 자신의 잘못을 퉁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린 사람인지라..아무리 자존심을 굽혀 살아간다 할지라도 비굴한 상황을 끊임없이 겪다보면 우울증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런 공간에서는 벗어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과거 나는 부산 쥬디스 태화점부근에서 부전역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큰 3층짜리 건물 쇼핑몰에서 MD로 잠시 일을 했었다. 수직적 가치관은 어쩌면 인원이 작은 회사에서 더 심각하다고 느꼈다. 직원수가 적은 만큼 책임의 몫은 강하고, 존재감이 크다 보니 사장과 가깝게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 보면 같이 있는 시간동안 성숙한 가치상대주의가 내면화되는 시간이 필요한데 거리낌없이 말을 하고 출퇴근이나 월급과 관련하여 면접시 제의 했던 말들과 전혀 다르게 적용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공정성은 흐려진다. 그래서 큰 회사에 가면 좋은 말이 있는 것이다. 큰 회사는 이미 정확하게 정해놓은 회사규칙들이 정해져 있고, 그 룰의 업무(지시사항)대로 잘 하면 큰 리스크를 겪지 않을 수 있다. 개인주의 문화는 작은 집단주의에서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좀 진지하게 고민해볼 물음이다.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는 한국사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활발하고 대기만성형인 인간들을 원하는데, 실로 그런 사람들만이 존재할까?



행복을 느끼는 것은 서로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 개인이 다양한 감각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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