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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Sep 09. 2023

마흔 호르몬

나의 글쓰기

마흔이 될 무렵 괜히 심술이 났다.

핸드폰 갤러리를 열어 보니 온통 아이들 사진뿐이었다. 아이들 옆에 찍힌 내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거울을 보니 입술에도 주름이 생기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그 주에 글쓰기 과제는 마흔 호르몬의 출구가 되었다.

엉켜 있는 심술과 억울함들을 글 한 편에 우겨 넣었다. 감정과 생각이 서로를 밀치고 들어왔고 정리되지 않은 채로 글 속에 드러났다. 글을 쓰면서는 감정에 빠져 속마음을 적으니 민망하기도 했지만 혼자 킥킥거리며 재밌게 썼다. 문제는 그대로라면 그런 아줌마의 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상대로 나의 글에 선생님이 표시한 빨간 펜 표시가 가득했다. 선생님은 한 문단마다 내용을 살펴보자고 했다.


첫 번째 문단은 헬스장이 무대였다.

글은 트레이너의 한 마디에서 시작했다. 애들 학교 가는 시간에 나와서 열심히 운동하라는 직업적인 그의 말이 나의 ‘마흔 호르몬’을 자극했다. 딱 봐도 내가 애들 키우는 엄마로 보이나 하는 아줌마다운 발상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문단은 내가 하는 운동에 대해 적었다.


세 번째 문단은 엄마의 운동, 네 번째는 남편의 운동 그리고 마지막 문단은 애들 학교 가는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는지 적었다.


쓸 때는 잘 몰랐다. 글 한편의 내용이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다시 보니 이말 했다 저말 했다 하는 수다나 다름 없었다.


선생님은 가끔 자신의 글을 프린트해 문단별로 잘라본다고 했다.

순서를 바꿔보기도 하고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와 불필요한 내용을 골라본다고 했다. 내가 쓴 글을 그렇게 해 본다면 여러 편의 글로 나눠야 할 것 같았다.




한 편의 글에서 하나의 이야기만 해야 한다는 것.

수업 시간에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듣고도 여러 번 반복한 실수이기도 하다.


쉽게 들리지만 글을 써 보면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말을 모으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적어보면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흐를 때도 있다. 소재만 같고 각 문단은 따로 놀기도 했다. 마인드맵을 그렸다고 첫 번째 연결 동그라미가 모두 각 문단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끔 내가 써놓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를 때도 많다. 선생님은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고 난 후 생각이 정리되는 거라고 하셨다.


글 한편에 섞여 있는 재료를 하나씩 꺼내서 한 편씩 써 보기로 했다.

1편은 헬스장에 있는 나에 집중했다.

트레이너가 무슨 근거로 나를 애들 키우는 엄마로 정확히 맞혔는지 추론했다. 운동복 때문인지, 인바디를 체크할 때 나이가 드러났는지, 배에 튼살이 보였는지 온갖 상황을 가정했다.


그것만으로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새로웠다. 필요 없는 디테일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지만 하나를 파고드는 집중력은 글을 더 탄탄하게 쪼여주는 느낌이었다.


한 편은 엄마의 운동으로 채웠다.

엄마의 운동 스토리에 대해서는 쓸 말이 많았다. 평소에 듣고 본 엄마의 운동 철학을 쓰는 과정은 내가 어렴풋이 쓰고 싶은 말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운동에서 얻는 생기, 몸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활기 있는 삶에 대해 쓰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또 다른 한 편은 남편의 운동에 대해 썼다.

남편이 운동하는 장면들을 조각조각 모아 글로 옮겼다. 그가 출전했던 태양의 철인 3종 대회 상황을 자세히 적었다. 여전히 운동하러 나간다고 하면 핀잔을 주지만 그 글을 쓰고 나서 나는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줌마가 노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한 편을 썼다.

그냥 놀 수 없어 듣게 된 글쓰기 수업과 내가 글을 써왔던 과정을 적었다.


1편이 10편이 될 줄 몰랐다.  갓 마흔이 된 가을 타는 아줌마의 무드로 시작한 글은 하고 싶은 말을 더듬으며 찾아갔다. 나는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을 모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딱 봐도 아가씨 같지는 않아 보이더라도, 주름이 늘어가는 게 우울하더라도 나는 생기를 찾고 싶었다.  10편을 하나의 결로 다듬어 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나는  ‘Vita Activa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브런치북을 엮었다.

Vita Activa는 라틴어로 활동적인 삶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이야기만 하는데 집중하며 한 편씩 쓰고 퇴고하기를 반복했다.

한 문장이라도 내가 하려는 말에 기여하지 않으면 빼는 것이 글쓰기의 미덕이라고 배웠다.



멀리서 줄다리기 경기를 보면 이길 것 같은 팀이 보인다.

체격이 비슷하다면 얼마나 서로 촘촘이 붙어서 밧줄을 잡는지 본다. 영차 하는 힘도 중요하지만 잘 모여야 한다. 양쪽에 선 사람들이 손을 교차해서 빈틈 없이 모이는 힘이 필요하다. 아마 그들은 서로 ‘바짝 붙어’라고 외치고 있지 않을까.


문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흩어지면 글의 힘이 떨어졌다.

바짝 붙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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