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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Aug 20. 2023

헤밍웨이는 한 번에 쓰는 줄 알았다

나의 글쓰기

글을 쓰기 전에는 몰랐다. 

작가들이 많은 퇴고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헤밍웨이는 머릿속에 있는 명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줄 알았다. 


최재천 교수는 글을 써놓고 3~4일간 읽고 고치는 과정을 반복하며 50번은 고친다고 한다. 그러니 어느 기자가 토씨 하나라도 자기 글에 손대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은유 작가는 글을 쓸 때 초고와 퇴고의 비율이 4:6 정도라고 했다. 자신이 쓴 글을 너무 많이 읽어 토할 것 같을 때 글을 발행한다고 하니 얼마나 보고 또 보는 걸까.     


“다음 주는 새 글을 쓰지 않아도 돼요.”

선생님이 휴식을 주시려나 하고 나는 속으로 기대했다.  


“지금까지 썼던 글 중에 한 편을 골라 퇴고하면 됩니다.” 


일주일간 놀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나의 기대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퇴고’는 나에게 낯선 단어였다. 

썼던 글을 고치는 건 새로운 글을 쓰는 것보다 막막할 것 같았다. 내가 쓴 글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덜 고쳐도 될 것 같은 글을 한 편 골랐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애초에 엉망인 글을 고쳐봐야 의미가 있나 싶었다. 썼던 글을 고치는 것보다 새로운 글을 많이 써 봐야 실력이 느는 게 아닐까 온갖 의심과 핑계가 생겨났다. 

과제는 해야 하니 종이에 빨간 펜으로 첨삭된 부분들을 먼저 살폈다.      


원래 어떤 일이 성공하려면 생각한 지 24시간 내에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데 생각이 긴 탓에 그런 추진력이 없는 데다 끈기가 부족해 천천히 내 호흡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읽어도 한 문장 안에 여러 문장이 들어앉은 게 보였다. 선생님이 퇴고를 위해 주신 팁 중 하나는 소리 내어 읽기였다. 읽어보니 숨이 찼다. 


수업 중 내가 가장 많이 지적받은 부분은 호흡이 긴 문장이었다. 

전체적으로 내가 쓴 문장들은 길고 복잡하다는 평을 들었다. 소설가 염상섭처럼 긴 문장을 잘 쓰는 대가도 있지만 보통 문장이 길면 비문이 되기 쉽다고 했다.      


어떤 일이 성공하려면 생각한 지 24시간 내에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나는 행동보다 생각이 긴 탓에 추진력이 부족했다. 대신 천천히 내 호흡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긴 문장을 끊었다. 

끈기가 부족해 천천히 일한다는 논리도 맞지 않았다. 한 문장이 세 문장이 되었다.  선생님은 문장을 되도록 간결하고 평범하게 쓰라고 말씀하셨다. 긴 문장을 나누어보니 비논리적인 연결을 하게 되는 실수가 줄었다. 덜 복잡하고 읽기도 편해졌다.


첫 문장은 짧고 강렬한 게 좋다고 했다. 전에 읽었던 다른 문우의 첫 문장이 그랬다. 


‘어머니는 농사꾼이셨다’. 


평범하지만 다음 문장으로 빨려 들어가는 힘이 있었다. 나였다면 어머니는 언제부터 농사를 지었는지, 어떤 농사를 지었는지까지 한 문장에 쓰려고 했을 것이다. 


20대 때 쌓은 내공은 이제 바닥이 보인다. 그리고 부모님 둥지를 떠나 결혼을 해 보니 나라는 사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리고’에 동그라미가 있었다. 

글을 다 쓰고 나서 접속사를 없애보라는 선생님 말씀이 기억났다. ‘그리고’를 지웠다. 빼도 글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접속사를 없애니 문장 간의 논리를 더 꼼꼼히 살피게 되었다. 


글을 쓰다 보면 자꾸 접속사를 쓰고 싶은 유혹이 든다.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를 넣어 문장끼리 이어줘야 할 것만 같다. 특히 ‘그러나’를 쓰지 않고는 앞뒤를 이을 재간이 없었다. 전후의 내용이 상반될 때 별 고민 없이 손쉽게 썼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써야겠지만 접속사가 글의 탄력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접속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흐름을 잃지 않으면서 글을 엮는 고민을 하는 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한 문장 안에 두 개의 동그라미가 표시된 부분도 있었다. 무엇이 잘못됐나 한참 들여다보니 같은 단어나 표현이 반복되어 있었다. 별 고민 없이 입말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생긴 일이기도 했다. 둘 중 하나를 다른 표현으로 고쳐 썼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고치고 나니 글이 조금은 정돈되어 보였다.


컴퓨터를 덮으려다 이대로 끝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고라는 말은 그저 고친다는 말일까. 글을 쓰기 시작한 후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사전은 찾아보고 가야겠다 싶어 네이버 검색창을 열었다. 한자로는 밀 퇴(推), 두드릴 고(敲). 밀고 두드린다는 건 무슨 말일까. 



당나라의 가도라는 시인이 시 한 편에 들어갈 말을 두고 씨름하는 이야기가 곁들여 있었다. 그는 마지막 구절에 문을 ‘밀다’로 할까 ‘두드리다’로 할까 고민하다 정신이 팔려 한 관리의 행차를 막아서게 되었다고 한다. 사연을 들은 관리 한유 시인이 ‘여보게, 그건 두드릴 고가 낫겠네’ 하여 퇴고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퇴고라는 말의 유래를 알게 되니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시인이 단어 하나를 두고 얼마나 고민하는지 느껴졌다. 표현의 어려움과 그 속을 뚫고 가려는 거듭되는 고민. 


그것이 퇴고의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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