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선입견매몰증
에어프라이어에 고등어를 구워 저녁 반찬으로 내놓았다. 별아도, 수인이도 생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나오는 고등어구이는 잘 먹는다. ‘이따금’이라고 했지만 사실 ‘어쩌다’가 맞는 표현이겠다. 1년에 여섯 번쯤 먹을까 말까니까.
생선을 자주 안 먹는 까닭이 딸들의 입맛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가시를 발라주기 귀찮은 것도 포함된다. 세심하게 발라내도 가시가 나올 때가 있다. 별아는 먹다가 가시를 골라낼 수 있을 만큼 컸지만 수인이는 아직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 자칫 목에 걸리면 일이 커질 수도 있다. 솔직히 나는 그 ‘일 커짐’이 성가시다. 내가 가시를 빼낸다면 다행이지만 못 빼내면 병원에 가야 한다. 별아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으니 둘 다 데려가야 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다. 때문에 되도록이면 생선은 아내가 집에 있을 때 먹는다. 나 혼자 큰일을 맞닥뜨리기 싫으니까.
그날은 아내가 없는 저녁이기에 한층 신경을 기울여 가시를 발라냈다. 딸들이 생선을 입에 넣고 오물거릴 때 혹시 가시가 나오나 더 눈여겨보았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즐거운 저녁식사가 이어졌다.
“고등어 진짜 맛있어. 아빠 요리 최고!”
수인이기 립서비스를 섞어 아빠를 칭찬했다. 그러자 별아도 가만있기 멋쩍었는지 한마디 꺼냈다.
“나두. 학교에서 먹는 것보다 아빠 게 더 맛있어.”
괜스레 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앞으로 고등어 자주 먹을까? 몸에 좋잖아.”
수인이는 별 생각 없이 좋다고 했는데, 별아는 언뜻 진지해졌다.
“자주 먹긴 좀 그래.”
“왜?”
“가시 때문에.”
별아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김치를 집었다. 나는 다음 말이 무엇인지 묻거나, 아니면 잠자코 있어야 했는데 내 멋대로 말을 이었다.
“하긴, 가시 골라내는 게 귀찮아서 생선 잘 안 먹는 사람도 꽤 있어. 게으른 거지.”
나는 뻔뻔하게도 남 이야기하듯 지껄였다. 그러면서 내 이야기가 아닌 듯 허허허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난 귀찮아서가 아닌데?”
“응? 그럼 뭔데?”
“가시가 목에 걸릴까 봐 무서워서.”
별아의 대답에 머리가 띵 울렸다.
“그, 그렇구나. 그런 마음이 있는 줄 미처 몰랐네. 미안.”
나는 서둘러 사과한 뒤 속으로 나의 경솔함을 탓했다. 선입견으로 딸의 마음을 재단한 모자란 나를 꾸짖었다.
평소 나는 별아의 게으름을 틈틈이 지적하곤 했었다. 자질구레한 일들이다. 학교 다녀와서 책가방 제자리에 안 두는 일, 숙제 미루는 일, 양치질하기 싫어하는 일 따위. 보통의 아이라면 누구나 가진 게으름일 뿐인데, 나는 옹졸하게도 그것을 빌미로 내 아이를 게으른 아이로 낙인찍었던 모양이다. 이 횡포를 모르고 있었다가 고등어 가시로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내 딸 별아는 게으름뱅이니까 당연히 가시 골라먹는 걸 귀찮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별아 덕분에 내가 꼰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꼰대선입견매몰증’ 환자라는 사실도. 자기 선입견을 자기보다 어린 사람, 약한 사람에게 함부로 들이대는 사람이 꼰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나보다 어리고 약한 딸을 나의 선입견으로 재단했다. 별아가 스스로를 대변하지 않았다면, 나는 줄곧 그 선입견에 ‘매몰되어’ 살았을 거다. 자기 단점을 잘 모르는 것 역시 꼰대의 특징이다. 아울러 선입견에 빠져 사는 꼰대는 타인의 실존을 잘 들여다보지 못한다. 고등어 가시가 주는 두려움은 열두 살 별아에게 엄연한 실존의 문제였다.
꼰대는 보통 자기 흠에는 너그럽고 남의 흠에는 엄격하다. 이 면에서도 나는 꼰대의 자격을 완전히 갖췄다. 나도 게으르면서 별아한테 게으르다고 했으니까. 별아에게는 부지런하라고 채찍질했으면서 정작 나에게는 채찍질은커녕 꿀방 한 알 먹이지도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