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나 고생만 시키는 남편의 엉터리 심리학 6

버킷리스트 역효과

by 작은별송이

사십대 초반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10가지를 적어 한글 파일로 컴퓨터에 저장했었는데,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번- 가족과 페루 마추픽추 등반

2번- 가족과 미국 디즈니랜드 가기

3번- 가족과 북극에서 오로라 보기

4번- 출판사 세워서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5번- 실명으로 창작동화집 출간


사십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버킷리스트 파일을 삭제했다. 사십대 후반인 지금 나머지 5가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에서 지워진 걸 보면 위에 소개한 항목들보다는 한결 소박했던 모양이다. 사실 소박하든 투박하든 이루지 못했다는 게 핵심이다. 이루었다면, 기억에 남았을 테니.


버킷리스트 파일을 없앤 이유는 단순하다. 실현될 기미가 안 보여서다. 경제적으로 꾸준히 곤두박질치니 버킷리스트가 신기루처럼 아득해졌다. 5번 빼고는 돈이 없으면 이루기 힘든 바람들이니 들여다보면 볼수록 무기력해졌다. 냉정하게 볼 때 10가지 항목 중 한 가지도 이룰 가망이 없었다. 끝내 나는 이 악물고 딜리트 버튼을 눌렀다. 그나마 일본 디즈니랜드를 다녀온 것은 큰 위안이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을 행복하게 체험한 시간이었다.

아니, 버킷리스트 파일을 없앤 이유는 복잡하다. 처음 버킷리스트를 만들었을 땐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마음에 생기가 돌았다. 왜 사람들이 버킷리스트 만들기를 추천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버킷리스트는 삶의 동력이, 희망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동력은 떨어졌고, 희망은 희미해졌다. 이루지 못하니까 허탈감과 자괴감만 커져갔다. 버킷리스트 목록을 작성하며 너무 과욕을 부렸나 싶었지만, 그걸 인정하기는 싫었다. 한마디로 ‘버킷리스트 역효과’가 나타난 거다. 버킷리스트가 안긴 즐거움은 우울함으로 변해 버렸다. 나는 그 우울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삭제를 선택했다.


경제적인 이유 외에 5번 항목을 실현하지 못한 영향도 무척 컸다. 돈과 상관없는 5번 항목은 내 꿈이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 십여 년 전부터 이미 ‘버킷리스트’였다.

나는 서른한 살에 계간지에 단편동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무렵 아동문학 출판사에서 새내기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작가와 직장인의 삶을 병행하기가 난감했다.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펴내면 내가 몸담은 회사에 누를 끼치는 거나 다름없었다. 경쟁사를 이롭게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편집자에게는 유명 작가를 물어와서 베스트셀러를 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건 이 사명을 등한시 하는 행위이다. 이런 현실은 새내기 편집자에겐 큰 부담이었다.


궁리 끝에 나는 신분을 감추기로 마음먹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필명으로 활동하기로 한 거다. 운 좋게도 7년 남짓 흐르는 동안 여섯 권의 창작동화집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많이 팔렸으면 솔직히 더 좋았겠지만 출판가에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린이 독자가 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기쁨이자 설렘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허탈해졌다.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게 피로해졌다. 진짜 내 이름으로 창작동화집을 내고 싶었다. 그 욕망을 이길 수 없어서 실명으로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주에라도 걸린 듯 뜻밖의 일들이 일어났다. 일단 원고를 거절당하는 건 기본이고(물론 필명일 때도 거절당한 적은 많았지만), 편집장이 출간 결정을 내린 것을 사장이 뒤집거나,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 계약이 엎어지는 사건들이 생겨났다. 기획동화, 정보 서적 같은 경우는 무난하게 진행됐는데, 꼭 창작동화집만 그런 불운을 겪었다.


‘내 이름으로 동화책을 내는 건 하나님 뜻이 아닌가?’


기독교인인 나는 오죽하면 이런 생각에까지 빠졌다. 지은 죄가 많아서, 아이들 앞에 서기엔 모자란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가로막는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창작동화는 아예 안 쓴다. 옛날의 필명으로 투고해도 번번이 미끄러져서 완전히 의욕을 잃었다. 생계를 지키기 위해 쉴 새 없이 돈을 벌어야 해서 창작동화를 쓰고 앉아 있을 시간도 없다. 나는 원고 교정, 윤문, 대필 등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요즘 아내는 이곳저곳 아프고 쑤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깨가 결리고, 골반이 쑤시고, 종아리가 당기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릿하다고 한다. 몸이 상한 아내를 위해 나는 ‘아주 가끔’ 안마를 해준다.

어느 날 맥없이 엎어진 아내의 몸을 주무르다가 설핏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호텔에서 한 달 살기, 해볼까?’


통장 잔고 없애고 아내가 치킨집을 그만두면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호텔에서 한 달 살고 체크아웃한 뒤의 삶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머릿속 생각을 밖으로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아내도 당장은 좋다면서 웃겠지만, 그저 웃음으로 끝날 테니까. 이 생각을 멈추자 새로운 생각이 둥실 떠올랐다.


‘뭐야? 호텔에서 한 달 살기가 지금 버킷리스트가 된 거임? 내 의지와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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