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서민 증후군
지금 살고 있는 25평 아파트는 결혼하며 주택담보대출로 마련한 신혼집이다. 15년 넘게 둥지를 한 번도 옮기지 않고 쭉 살았다. 천만다행으로 대출금은 다 갚았다. 처음 2억 남짓했던 집값은 6억대로 뛰었다. 세 배 정도 올랐지만 착시효과일 뿐 좋아할 일은 아니다. 다른 집들도 같이 올랐고, 더 오른 데도 많으니까.
이사를 고민 중이다. 별아 중학교 진학 문제와 아내 일터 문제가 이사의 주요 동기다. 하지만 서울 안에서는 우리 집을 팔아봐야 같은 평수 아파트는 언감생심이다. 두 가지 문제를 다 덮어둔 채 대책 없는 새 출발을 각오하고 서울을 떠나면 조금 더 넓은 평수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경우 별아 전학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3학년 때까지 친구 관계로 고통을 겪었던 별아는 4학년 때부터 친한 친구들이 여럿 생겨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5학년 때는 부반장도 되어 행복이 더해졌다. 부모가 주도하는 이사로 딸의 행복을 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날 집에서 아내와 단둘이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그냥 시골 싼 집으로 이사 갈까? 남은 돈으로 세계일주나 가는 건 어때?”
일단 웃음이 나왔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세계일주는 내 꿈인 동시에 별아의 꿈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 입에선 생뚱맞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라 저절로 나온 거다.
“자기, 집 판 돈 쓸 수 있겠어?”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아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 나도 긴장이 됐다. 괜히 흥을 깬 건 아닌가? 그냥 신나게 맞장구나 쳐줄걸 그랬나?
이윽고 아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벼운 웃음 뒤에 이어진 한마디.
“못 쓰겠는데.”
나는 괜히 멋쩍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내도 그냥 웃어버렸다. 꿈과 현실이 다른 것을 인정하는 웃음 같았다.
‘천생서민 증후군’이란 말을 지어 보았다. 딱 우리 부부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아내나 나나 타고난 서민이다. 상상에서조차 돈을 펑펑 못 쓰는 걸 보면.
지금껏 살면서 통 크게 돈을 쓴 적이 있었나 싶다. 쥐포 한 봉지 사는 데도 벌벌 떠는 걸 보면 아마도 없었을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쥐포는 우리 부부에게 신세계를 마주하게 해준 ‘꿀템’이다. 시리얼 봉지와 엇비슷한 크기의 봉지에 담긴 쥐포는 우연히 어느 할머니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아내가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모르는 할머니가 “이거 진짜 맛있어요.” 하며 추천해 주었단다. 쥐포 마니아인 아내는 반신반의하며 쥐포를 집어들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말은 진실이었다. 진짜 맛있었다. 구워 먹어도, 날로 먹어도 입에 착착 감겼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상설 할인판매 상품이었지만 무려 19,800원! 새우깡처럼 자주 사 먹기에는 제법 부담이 갔다. 딸들이 쥐포를 좋아하면 두 눈 꼭 감고 살 텐데, 그게 아니라서 넙죽넙죽 사기가 껄끄러웠다. 아이들 간식비보다 엄마 아빠 간식비가 더 들어가면 쓰겠는가!
장은 주로 내가 본다. 쥐포를 살 때마다 망설인다. 사려는 마음을 두 번 먹으면 한 번은 거르고 한 번만 산다. 내게 두세 번 쥐포를 주문했던 아내는 이제는 침묵만 지킨다. 내가 사다 주면 먹고 안 사다 주면 참으려는 마음이 엿보인다.
쥐포를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돈을 많이 벌거나, 아이들이 쥐포를 좋아하게 만들거나. 어떤 방법이 더 쉬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고민은 서민들만의 몫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