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가 있는 집

by 정오월
< 전에 살던 집의 베란다 >


이전에 살던 집에는 베란다가 있었습니다. 한 층에 좁은 계단실과 작은 원룸 세 개가 붙어 있고 단독주택만큼 규모가 작은 다가구주택이었는데, 내가 살았던 4층, 꼭대기층만 작은 방 두 개와 거실 겸 주방이 있는 한 집이었습니다. 인접대지와 이격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4층의 벽면을 아래층보다 안쪽으로 후퇴시켰기 때문에,안의 면적은 아래층보다 작아지고 그 면적만큼 널찍한 베란다가 생겼죠. 3층의 옥상이 4층의 베란다가 되는 겁니다. 건축주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지은 건 아니고요, 이웃집이 햇빛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인 "일조권"을 침해받지 않도록 건축법에서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대공원이 블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동네는, 골목길이 좁고 필지가 다들 작은 데다가 건축물 층수가 4층 이하로 제한된 제1종일반주거지역이라서 작은 단독주택, 다가구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골목을 지나면서 어느 집은 세탁기를 돌리고 어느 집은 저녁상을 차리고 있다는 걸, 노력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죠. 부부 싸움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리면 어찌나 민망한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의 베란다가 더 넓어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당 있는 집에 사는 게 꿈이었던 나는 그 집에 이사 가면서 꿈을 절반쯤은 이룬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집에 사는 동안 베란다를 잘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방의 이웃집들과 창문을 통해 아이 컨택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서, 베란다에 있으면 어디선가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신경이 쓰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사 가서는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는데 마음이 영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고, 시선을 피하려고 1인용 그늘막 텐트를 설치하고 들어갔더니 야외 느낌이 나지 않더군요. 햇볕에 빨래를 말리기 좋았는데 아무거나 널기엔 조심스럽고, 잘 자랄 줄 알았던 식물들은 직사광선 아래에서 힘없이 웃자랐습니다. 집 안에서 반쯤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베란다를 내다보는 게 대부분이었죠.



나와 달리 집에 놀러 온 친구는 이웃집들 사이로 산자락이 제법 보여서 좋다며, 자기 같으면 시간 날 때마다 베란다에 앉아서 책을 읽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친구뿐 아니라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은 모두 그 베란다를 좋아했죠. 우리 가족은 적극적이었습니다. 조카가 제일 먼저 베란다로 나가면 다들 따라 나가 그 사이 달라진 동네 풍경을 둘러보며 서성이곤 했습니다. 조카가 베란다에서 놀면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몇 번인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고요. 나도 여럿이 같이 있으면 이웃이 시선이 의식되지 않고 좋았습니다.


그 베란다를 가장 좋아했던 건 우리 조카였습니다. 다섯 살부터 열한 살까지 자라는 동안 그 베란다에서 별거 아닌 것들을 재미있게 했습니다. 물조리개에 물을 채우느라 욕실을 몇 번씩 드나들면서 화분에 물을 듬뿍 뿌려주는 것으로 시작했죠. 아직 때가 되지 않은 화분 갈이나 가지치기, 꺾꽂이를 하고 농사짓는 기분을 내고 싶다며 허브, 뿌리채소 같은 걸 심기도 했습니다. 비눗방울 불고 물총 쏘는 것도 좋아했는데, 둘 다 없을 땐 분무기로 대신했습니다. 한여름에는 그늘막 텐트를 치고 들어가 책을 읽었는데 너무 덥거나 비가 와서 오래 못 버텼죠. 이것저것 다 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안 해도 되는 유리창 청소를 신나게 했습니다. 다음에 자기가 와서 또 청소할 테니까 이모는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요. 어디서나 할 수 있는 놀이들이지만 베란다라는 공간이 색달라서 더 재미있었나 봅니다.


조카가 무엇보다 좋아했던 건 눈 오는 베란다였습니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내고 눈을 뭉쳐서 작은 눈사람을 만들면서 실컷 놀더니 어린이대공원보다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플라스틱 통에 눈 덩어리를 담아서 집안에 놓고는 녹는 걸 지켜보거나, 반대로 베란다에 쌓인 눈 위에 무언가를 놔두고 집 안에서 창 너머로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도 했죠. 눈이 오는 날 놀러오지 못할 때에는 베란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와서 깨끗한 눈을 처음으로 밟을 테니 그때까지 절대 베란다에 나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요. 테라스에 소복이 쌓인 눈 사진을 조카에게 보냈더니 "대박!"이라고 답한 문자메시지가 아직 내 핸드폰에 있습니다.



베란다의 역할이 마당의 절반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나에게는 공간 활용보다는 이웃집과의 이격거리 확보에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처음 그 집을 보고 반했던 탁 트인 시야가 사는 데는 불편했던 거죠. 전망을 가리더라도 난간이 높고 차폐가 된다면 친구 말처럼 베란다 구석에 앉아서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역시 뭐가 더 좋은 지는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거고, 담장이 있는 마당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습니다. 이쯤에서 그거 테라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습니다. 주로 건물의 상층부에 확보된 외부공간으로서 바닥에 데크라고 주로 불리는 나무판자가 깔려있으며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 파라솔, 차양 등과 세트로 떠올리는 공간이죠. “테라스 좌석”이나 “테라스 카페”라는 말이 참 익숙합니다.


베란다와 테라스 둘 다 건축법에서 뜻을 정의하지 않았지만 흔히 사용하는 건축“용어”니까 한 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법적 정의가 없다면 학술적, 이론적인 정의가 있는지 살펴보고 가장 기본이 되는 국어사전도 찾아봅니다. 인터넷으로 잠시만 검색해도 꽤 혼용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네요. 확실한 쟁점만 정리해봅니다. 베란다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아래층과 위층의 바닥면적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는 공간입니다. 아래층의 지붕이 위층의 마당이 되는 것이지요. 꼭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 “발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건축법에 정의하지 않았고 설치기준도 없습니다.


그와 달리 테라스는 1층에 있는 공간입니다. 테라스의 어원인 “terra"가 대지, 땅을 뜻해서 그런지 정원과 연관한 설명이 많습니다. 정리하면 건물 내에서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건축 공간의 개념이 외부로 뻗쳐나간 것을 뜻합니다. 주로 흙을 밟지 않도록 타일, 돌, 나무판 등을 평평하게 깔아서 바닥을 조성하고 건물 내부와 직접 드나드는 출입문을 설치하죠. 그래서 ”3층 테라스“라는 말은 원칙적으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베란다 카페“는 왠지 덜 멋있게 들리는군요. 또한 테라스는 건축면적에 포함되지 않는 외부공간이고 반드시 설치해야 할 의무도 없기 때문에 베란다와 마찬가지로 건축법에서 정의하거나 기준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 테라스 사례 >


머리가 좀 아프지만 베란다와 테라스는 이제 구분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발코니”가 남았군요. 공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가장 많이 쓰이고 실제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공간이니 확실히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게다가 발코니는 건축법에 근거를 둔 용어인데 역설적이게도 건축법의 모순된 정의와 기준 때문에 오히려 더 헷갈리는 녀석이기도 하니까요. 건축법시행령 제2조(정의) 제14호에서는 발코니를 “건축물 외벽에 접하여 부가적으로 설치되는 공간”으로 정의했습니다. 쉽게 떠오르죠. 건물의 외벽 밖으로 튀어나온 서랍 같은 공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다른 얘기를 합니다. “주택에 설치되는 발코니로서 필요에 따라 거실ㆍ침실ㆍ창고 등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고요. 이 조항은 발코니를 실내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아파트의 발코니를 떠올려봅니다. 거실ㆍ침실의 일부가 되어버린 곳 말고요. 베란다라고 많이들 말하고 들었죠. 하나같이 유리창으로 완전히 덮여있습니다. 날씨에 상관없이 공간을 사용하기 좋고 냉난방에도 유리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렇듯 완전히 실내공간이 된 발코니는 건축법에서 정의한 “건축물 외벽에 접하여 부가적으로 설치되는 공간”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 때문에 발코니라는 명칭이 헷갈리는 건 아닐까요? 발코니는 위아래 모두 건축물이 없이 바닥만 건축물 외벽에서 튀어나온 공간이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벽과 천장으로 닫아 실내가 된 아파트 발코니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게 과연 합당한 지 의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내공간이 된 아파트 발코니 공간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엄마만 해도 빨래 널고 화분 놓고 재활용품 모아두면서 알뜰하게 쓰십니다. 베란다, 테라스, 발코니의 본래 의미에 대해서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길게 얘기했지만, 막상은 대충 섞어서 사용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아파트 발코니에서 마당 못지않게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키우는 “식집사”들이 늘고 있는데 다들 “베란다 가드닝”이라고 하더군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3층 테라스 카페”도 뭐 어떤가요. 어차피 법에서 정한 뜻이 없고 또 법에서 정한 뜻이 앞뒤가 다른데 말입니다.


"베란다 프로젝트" 라는 밴드가 있었습니다. 솔로 뮤지션 김동률과 이상순이 함께한 프로젝트 밴드로 단 한 장의 앨범을 냈는데요, 베란다에서 듣기 좋은 음악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그런 밴드명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생각한 베란다는 정말 베란다였을까요? 테라스나 발코니는 아니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 아파트 발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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