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친구와 밥을 먹다가, 물론 친구가 사줬습니다, 친구가 문득 나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잘 쓸 거 같다면서요. 종이신문을 보다가 나한테 보여주고 싶은 기사가 있으면 인터넷에서 해당 기사를 찾아 카카오톡으로 링크를 보내주는 친구입니다. 원래는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이미지를 보내줬었는데 이삼 년 전쯤부터 기사 링크를 보내주고 있죠. 아마 다른 누군가에게 그랬다가 구시대적인 행태라며 핀잔을 들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가끔은 어느 도서관의 추천도서 목록에 있을 것 같은 인문학 서적이나 명사들의 강연 유튜브 동영상을 재미있다면서 추천해주기도 합니다.
소설은 잘 읽지도 않는 친구가 소설을 쓰라고 해서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마침 단편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때였거든요. 이전에 소설 쓰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솔직히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써보고 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친구에게 소설 쓰는 게 내 성향과 맞아 보인다는 얘기를 들으니 잘 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쓸 수는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했죠. 직장생활 동안 제안서를 수십 번 작성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세 가지 유형의 글쓰기 항목으로 구성된 “브런치 활용계획서”와 따져보면 별 거 없는 데 있어 보이게 포장한 “작가 소개”를 써서 첨부했습니다. 덕분에 혹시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생각해 보기도 전에 승인이 되었네요.
친구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하고 “브런치 활용계획서”를 보내줬습니다. 그 안에 있는 단편소설의 개요와 시놉시스를 보고 의견을 달라고요.
“소설을 쓰면서 내용에 살이 붙고 달라질 수 있는 거지?
내가 쓰려는 소설에 냉철하게 꿰뚫는 시선, 통렬한 사회 비판, 처절한 응징 같은 게 없어서인 듯했습니다. 친구는 내 생각과 글의 뾰족함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하던 일과 관련 업계의 불편부당함에 대해 얘기하면 그걸 글로 써서 어딘가에 투고 내지는 고발하라고 했고, 2년 전에 일을 완전히 그만두었을 때에는 제일 먼저 기자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했었죠. 참으로 편견이 없는 친구입니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공개 모집하는데 친구가 좋은 기회라며 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할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문득 내가 그만큼 역량이 안 되기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얼마나 우스웠던지, 다시 떠올려도 온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옆에서 부추기는 얘기를 계속 듣다 보면 사람이 이렇게 주제를 모르게 되더군요.
친구가 처음부터 응원을 해준 건 아니었습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을 이십 년 동안 하면서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고 회사 앞에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을까요. 그럴 배짱도 없었으면서요. 처음에 친구는 그냥 하던 거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일은 내가 봐도, 아니 어느 누가 봐도 천직입니다. 그 일을 왜 해야 하는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고, 힘든 프로젝트라도 끝내고 나면 그만큼 역량이 늘어서 도움이 되니까 그냥 다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어리다고 할 수 있던 때, 업계가 호황이라서 일이 많던 시절에 친구는 한 달에 추가 근무를 150시간씩 하면서도 나처럼 그만두고 카페나 하고 싶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죠. 크리스마스이브에 같이 점심을 먹고는 현장에 갈 거라며, 처음 보는 현장이라 기대된다고 웃으면서 돌아서던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언젠가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려면 나는 뭐가 되어야 할까,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잘하는 건 요리, 집 가꾸는 거, 식물 키우는 게 먼저 떠오르네. 전반적으로 살림에 소질이 있고 좋아하는 뜨개질이랑 바느질도 집에서 하는 거니까, 가정주부가 딱이다.”
그렇지만 1인 가정이라 내가 주부가 되면 돈 벌 사람이 없어서 안 되겠네, 하는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웃고 말았죠. 요리를 잘하니까 식당을 해도 성공할 거라고 친구가 눈을 반짝이면서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여태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요리를 얼마나 못 하면 내가 만든 음식에 그 정도로 감탄할 수 있냐고 했더니 친구가 곧바로 수긍하더군요. 뜨개질이나 바느질해서 만든 걸 선물하면 반드시 걸치고 들고 놓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줍니다. 어떤 점이 특히 좋은지 설명도 덧붙이고요. 제법 공들여 만든 것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모델이 되어줍니다. 사진 찍는 걸 매우 많이 싫어하는 데도 말입니다.
내가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카페 창업을 고민할 때에도 친구는 브랜드를 어떻게 만들 건지, 카페의 규모나 운영방식을 어떻게 할 건지 등에 대해서 꼼꼼히 물어보고 나는 대답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죠. 이제 카페는 먼 훗날 언젠가의 꿈으로 미뤘지만 아직도 같이 카페에 가면 커피를 마시기 전에 사진 찍으라고 기다려 줍니다. 이게 다 자료가 되는 거 아니냐면서. 가끔은 자기도 찍어 보고 자기 사진이 더 나은 것 같다며 보내주기도 하고요. 여전히 사진 찍는 걸 매우 많이 싫어하는 데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틈틈이 뜨개질과 글쓰기에 대해서 어디선가 인상적인 글이나 영상을 발견하면 추천도 해줍니다.
그렇게 친구는 오랫동안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줬습니다. 뭐가 싫고 뭐가 좋고, 어떻게 하고 싶고 어떻게 하려는지. 딱히 달라지는 게 없어서 지겹고 주로 불평불만이라 듣기 싫었을 법한데도, 내 입장에서 듣고 질문하고 의견을 얘기하고는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내가 얘기하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습니다. 뭔지 알겠다, 하면서요. 그런데 다 듣고 나서는 내가 한 얘기와 상관없이 원래 하려던 말을 합니다. 그냥 자기가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자기 얘기를 하는 거죠. 늘 생각하던 것을 벗어나는 범위로 생각을 확장 또는 전환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다못해 남이 하는 얘기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생각에 맞춰서 들게 되죠. 나 역시 그렇습니다. 남의 얘기를 들으면서 자꾸 내 맘속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다행히 나는 남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친구 덕분에, 게다가 그 친구가 편견이 없는 덕분에, 주제를 망각할 만큼 내 장점을 찾아서 칭찬해주는 덕분에 지금을 잘 버티고 있습니다. 오래 놀고 있는데도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친구에게 말했을 때, 나는 핀잔을 들을 줄 알았습니다. 회사 가기 싫다고 했다가, 과장일 때에는 “과장씩이나 되어 가지고” 차창일 때에는 “차장씩이나 되어가지고 회사에 가기 싫다는 게 말이 되냐.”는 말을 듣고 이후로는 안 했었죠. 쉬고 싶다고 했더니 “죽으면 영원히 쉴 수 있는데 뭘 더 쉬려고.”하는 걸 세 번인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친구가 뭐라면서 혼낼까 했는데 의외로 응원을 해줬습니다.
“딴생각 한 번 안 하고 공부도 일도 하라는 거 다 하면서 여태 살아왔잖아. 사춘기도 그냥 보내고. 지금 평생 할 딴짓 몰아서 한다고 생각해. 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뭔지 오랫동안 천천히 생각하고 해 보고, 그러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듣는 것은 다르더군요. 아무리 내가 확신이 있어도 말입니다. 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므로,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나 스스로를 설득해야 합니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미래가 걱정되니 자꾸만 망설이고, 선택의 결과가 안 좋을 경우 뒷감당은 다 내 몫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그걸 책임감으로 포장하려고 하니까요. 내가 찾은 길 앞에 나 혼자 서야 하지만 응원을 받으면 발걸음을 내딛기가 좀 더 수월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한 가지만 공부하고 한 가지 일만 하다가 다 떨치고 새로운 길을 찾겠다고 했을 때 들었던 충고 하나를 마음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하려는 게 뭐든 간에 스스로 확신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으로부터 공감을 얻고 응원을 받아야 버틸 수 있어. 가족이든 친구든 일로 만나서 별로 안 친한 사람이든. 아무리 맞는 길이어도 나 혼자서는 자꾸 흔들리게 되거든.”
그렇게 말한 사람은 대학원 선배이자 한 때 평생 다닐 거라고 생각했던 회사의 대표님이자 7년간 살았던 전셋집의 주인이었습니다. 선배도 운영하던 회사 사무실이 화재로 전소되는 일을 겪으며 결국 폐업하고 업종을 바꾸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면서 고생을 많이 했죠. 선배나 나나 만약 화재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하던 일을 지금까지 같이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 털어내듯이 서울을 떠나고 일도 마침내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을 때, 선배는 자신의 책임도 있는 듯이 미안해했습니다. 안 돼서 포기하는 게 아니고 더 잘 살려고 선택한 거라는 내 말에도 미안함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것 같고요. 그래서 선배의 그 얘기가 더 진심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냉철하게 꿰뚫는 시선, 통렬한 사회 비판, 처절한 응징이 없이 둥글둥글한 내 글에 친구가 실망할까 봐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히도 친구는 내 글이 따뜻하고 깊다며 좋아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쓴 글을 전부 다 읽고 가끔은 어떤 부분이 특히 좋은지 의견도 얘기해주는 유일한 애독자가 되어주었죠. 이런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좀 더 고민해서 쓸 걸 너무 성급히 썼나 싶다가도 친구가 좋다고, 재미있다고, 밑줄 치면서 읽게 빨리 책으로 발간하라고 하면 다음 편을 쓸 용기가 생깁니다. 예전에 어느 인디뮤지션이 공연장에 관객이 단 한 명만 와도 기쁜 마음으로 공연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심정을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나를 응원해줄 때마다 선배의 말이 떠오릅니다.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아무도 없는 길에 혼자 서 있으니 불안한데, 친구의 말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을 힘이 되는군요. 그리고 문득 나는 친구에게 그런 힘이 되어 주었는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친구가 나에게 해주는 만큼 친구 입장이 되어서 친구를 생각해준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평생을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중늙은이가 될 때까지 초롱초롱한 눈빛을 잃지 않는 것도 편견 없이 남의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친구가 나를 칭찬해주는 것쳐럼 충분히 표현했는지 모르겠네요. 사람은 역시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존재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친구가 나에게 무려 전생에 마르셀 프루스트였던 거 아니냐고 했을 때, 나는 스스로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나의 삶의 태도인 “자기 객관화”를 잠시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급기야 소설도 잘 쓰고 수필도 잘 쓰니까 헤르만 헤세랑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는 황송하면서도 어깨가 으쓱했죠. 이렇게 그냥 내키는 대로 쓰기만 하다가 남는 건 내가 쓴 글뿐이고 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친구의 말을 떠올리면서 기운을 내고 계속 글을 써야겠습니다.
헤세처럼 글 쓰라며 친구가 보내준 책을 방금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 책을 읽으면서 잃어버린 나의 주제를 다시 찾게 되겠지요. 그리고 글을 더 잘 써야겠습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 인정할 만큼 정말로 글을 잘 쓰게 되었을 때, 친구를 위해 글을 한 편 써야겠습니다. 날 응원해주는 한 사람. 딱 한 사람만 있어도 나는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