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본가에 갈 때마다 고민되는 게 있습니다. 우습게도 옷차림입니다. 노트북을 비롯해서 약간의 짐을 챙겨야 하는데, 가방을 손에 들거나 한쪽 어깨에 메는 걸 매우 싫어하는 나는 백 팩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니 캐주얼 한 차림이 어울리고 기차를 한참 타야 하니 편해야 하죠. 그 이후에도 집까지 가는 먼 길을 생각하면 구두는 어림도 없습니다. 내 딴에는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옷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 입는 건데, 부모님 눈에는 그게 종종 초라해 보이고 그럴 때면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나 봅니다. 아마도 사십 대, 중년의 여성에게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백화점의 “숙녀복 매장”에 걸려 있을 법한 옷들을 떠올리는 거겠죠. 뉴스 앵커나 드라마 속의 커리어우먼들이 입는 번듯한 정장 스타일 말입니다.
불편한 옷은 생각만 해도 몸이 굳는 느낌이라 회사 다닐 때에도 잘 입지 않았는데 부모님 집에 가면서 차려입어야 하는 건지, 짐을 챙길 때마다 고민하는데 결국은 편하고 내 마음에 드는 옷을 고릅니다. 그리고 엄마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죠. 시작은 언제나 “옷이 이거밖에 없니?”입니다. 내가 이 셔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제일 마음에 드는 걸로 입은 거야, 라는 내 말은 엄마에게 들리지도 않습니다. “저번에도 이거 입고 왔잖아.” 좋으니까 자주 입는 거라고 말하면서, 나는 원래 옷이나 가방이나 좋은 게 있으면 낡을 때까지 교복처럼 입고 메고 다니는데 그게 뭐 그리 잘못이라고 이렇게 항변을 해야 하나 싶습니다.
이번에는 저에게 지원군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가 내 편을 들어주려는지 자세히 보니 셔츠에 그려진 그림이 귀엽다 하고, 동생도 이런 옷이 여름에 입기 시원하고 좋다고 나서줬네요. 다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엄마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하면서 상황이 끝났죠.
“옷도 못 사 입고……”
사실 핵심은 “옷”이 아니라 “못 사”에 있습니다. 내가 번듯한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잘 벌고 있다면 내 옷차림에 대해 부모님이 이렇게까지 한탄하지는 않을 겁니다. 회사에 다닐 때에도 가끔씩 좋은 옷을 사 입어라, 사줄까, 하는 얘기를 들었으니 백수인 지금은 오죽할까요. 그때 부모님은 내가 번듯한 옷 사는데 드는 돈을 아낀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돈이 없어서 못 산다고 생각해서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겨죠. 이미 나에게는 정장이 몇 벌 있고, 단지 내 몸은 전혀 상관 안 하고 저 혼자 멋진 모양을 유지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그런 옷들을 잘 입지 않을 뿐인데 말입니다. 안 그래도 내 몸과 맞지 않는 책상과 의자 사이에서 종일 끼어있는 게 고역인데, 어쩌다 중요한 보고라도 있어서 정장을 입게 되면 얼마나 불편하던지요.
지금은 백수이고 몸은 살찌고 뻣뻣해져서 누가 봐도 회사원은 아니다 싶도록 맘껏 편하게 입고 다니는데, 부모님 눈에는 좋은 옷이 없어서 아무거나 입는 걸로 보이나 봅니다. 그렇다고 해도 반발심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내 옷차림이 초라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지만, 나를 부끄럽거나 안쓰럽게 생각하지 말라고 부모님을 설득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고 겉치레하라는 게 아니라 부모님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막상 부모님은 자식들이 같이 가자고 하지 않으면 옷가게에 갈 일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어디 잘 보일 데도 없으니 아무 거나 입어도 된다고 하면서 자식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을 아니까, 오히려 미안합니다.
엄마가 동생네 집에서 지내며 조카를 키워주던 때에, 엄마는 종종 나에게 동생이 안쓰럽다고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 동네에서 얼굴이 까칠하고 머리가 푸석푸석하고 명품 옷을 입지 않는 여자는 동생밖에 없다고, 동생이 제일 힘들게 사는 것 같다면서요. 물론 그럴 리가 없죠. 게다가 주말엔 당신 집에서 평일엔 딸네 집에서, 전철로 한 시간 반 거리의 두 집 살림에 손자까지 키우는 엄마가 더 힘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고된 회사생활을 하는 걸 곁에서 지켜보았을 때, 엄마는 아마 동생에게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게 사는 것 같다고 했을 겁니다. 나는 엄마가 자식 걱정을 줄이고 본인에게 더 관심 갖고 재미있게 살면 좋겠는데, 아무리 진심을 담아 얘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더라고요.
“나는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거고. 너희는 안 힘들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내 생각엔 내가 잘 사는 것과 어떤 옷을 입느냐는 별 상관이 없지만, 부모님 생각에 얼굴빛이 환하고 머리카락에 윤기가 나고 번듯하게 차려입으면 잘 사는 것처럼 보여서 안심이 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수밖에. 부모님 눈에는 걱정필터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여태 알아서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 내 살 길 찾는 것도 걱정 안 한다고, 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걱정필터는 계속 작동합니다. 나는 정말로 괜찮은데 그걸 말로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모님 눈에 괜찮지 않아 보이는 거죠. 사실 옷을 안 사는 것보다 못 사는 게 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식 걱정하는, 그것도 걱정할 만하니까 하는 부모님 마음을 내가 어쩔 수 있을까요. 그저 잘 지내는 모습 보여드리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겠죠. 앞으로는 번듯하게 차려입고 집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전편을 네 번 정도 보았고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가 어디선가 하고 있으면 무조건 볼 정도로 좋아하는 드라마입니다. 책도 영화도 드라마도, 여러 번 보다 보면 그때그때의 내 상황이나 심경에 따라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 달라지게 마련이죠. 최근에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주인공인 박동훈 부장이 상무로 승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큰 회사의 임원, 최고는 아니지만 충분히 오를 만큼 올랐다고 할 수 있는 직위에 올랐을 때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기뻐한 건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겠지, 전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던 장면입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의 눈물과 웃음이 섞인 그 감정에서 기쁨보다 안도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우리 아들이 남의 눈치 덜 보고 기죽을 일도 없이 잘 살겠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 어머니는 아들의 성공 덕분에 자신에게 돌아올 무언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아들이 잘 살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부모님에게 그런 기쁨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분야에서 이십 년동안 성실히 일했으니딱히 이룬 게 없어도 아쉽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조금 후회가 되었습니다. 자발적 백수인 내가 나는 부끄럽지 않지만, 부모님에겐 어쩔 수 없는 아픈 손가락이겠죠. 일찌감치 부모님의 삶에서 내 삶을 분리하고 중요하거나 사소하거나 모든 결정은 나 혼자 그 결과도 나 혼자 책임지면서 사는 게 당연했는데, 처음으로 내 삶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효의 마지막이 입신양명이라는 옛 말도 공감이 되네요. 자식의 직업이 자랑스러워서 굳이 이름 대신 “김 판사”, “김 교수” 등으로 부르는 걸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만, 자식의 삶과 본인의 삶을 동일시하는 부모님의 마음에는 그런 세속적인 자식 자랑만 있는 건 아니죠. 자식이 잘 살면 그 자체만으로도 부모님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태 그 생각을 못하고 그저 내가 됐으면 된 거다, 하며 살았네요. 그렇다고 뭐, 이런 생각을 좀 했다고 해서 당장에 내가 사는 게 달라지진 않습니다만.
“그냥 부모님한테 말 곱게 하고 가끔씩 손 잡아드리고 안아드리고 그래. 그게 최고야. 전혀 안 하지? 나는 가끔 그렇게 해.”
몇 년 전에 친구에게 들은 말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부모님한테 내 도움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는 얘기를 친구에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가 이 글을 읽는다면 같은 말을 하겠네요. 그렇죠. 입신양명하기 전에 평소 행실부터 잘하는 게 맞는 거죠. 그리고 내가 잘 살면서 부모님께 잘 사는 모습을 보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잘 살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주 후회하고 반성하네요. 겨울엔 추워서 기운이 안 나더니 여름엔 덥다고 늘어져서 생활이 엉망입니다. 달리기를 안 한지 오래되었고 산책도 부쩍 줄었고, 글도 안 써져서 일주일째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점점 깊이를 알 수 없는 물 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방에서 나를 눌러 내리는 물처럼 무거운 압력이 느껴지죠. 허우적거리다가는 힘만 빠질 것 같고 그럴 필요도 안 느껴져서 가만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편한데 매사에 의욕이 생기지 않는 건 왜일까,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취감을 느낄 만한 성과가 없어서일까, 열심히 하지 않아서일까, 애초에 나는 정말 무언가를 하고 있기는 한 걸까. 질문만 있고 답은 없습니다. 나는 분명 노는 게 체질이지만, 열심히 일하다가도 문득 이걸 왜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처럼 백수생활에도 이게 맞나 싶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 하나에 모든 게 허물어집니다. 수없이 많이 생각했고 그래서 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밖에 나가서 걸으며 기분전환을 하고 나서, 미뤄둔 숙제 하듯이 글을 쓰기로 합니다. 조금이나마 비가 왔다가 그친 후여서 그런지 눅눅한 바람이 붑니다. 몇 걸음 걸으니 바로 땀이 나게 더운데 그래도 바깥공기를 쐬니까 머리가 개운해집니다. 먼 하늘을 보니 눈이 시원하네요. 머릿속으로 대략 경로를 정해서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옵니다.
“너 또 돈 놔두고 갔더라. 네 옷 넣는 서랍은 내가 확인했는데 내 서랍에 넣어놔서 이제야 봤잖니.”
집에 갈 때마다 엄마가 돈을 자꾸 줍니다. 처음에는 그대로 놓고 왔는데 엄마가 너무 속상해해서 요즘엔 일부는 챙기고 일부는 두고 옵니다. 며칠 전 집에 갔을 때 엄마는 내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해준 김치와 마늘다지기 값에 왕복 기차요금을 더했다며 돈봉투를 내 가방에 넣었습니다. 엄마가 차비를 주면 내가 집에 가는 마음이 더 불편하다고, 그래서 차비만 남겼고 앞으로도 차비는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알았다고 했지만 아마 다음에도 또 차비를 줄 것입니다. 그 얘기를 전에도 했는데 여전히 주겠다고 하니까요.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지만 얼른 생각을 멈추고 거리 풍경에 집중합니다. 수백 번쯤 걸었지만 오늘과 완벽히 똑같은 풍경은 이전에 없었습니다. 매번 눈에 보이는 색상과 채도가 다르고 몸에 닿는 공기의 온도와 바람이 다르고, 그래서 매번 걷는 게 재미있죠.
이제 바닥을 딛고 올라가는 중입니다. 다행히 기운이 다 빠진 건 아니라서 곧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 숨을 쉬겠네요. 잘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