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뜻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단편소설 [ 쩨쩨한 히어로 ]
습관
아침 7시 반. 직장인으로 살 때 일어나던 시간으로 호기롭게 맞춰 놓은 알람은 아무 소용없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 단 하루도 그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다. 나 스스로 시간을 설정해 놓았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잠시의 고민도 없이 알람을 끄고 나서, 어떤 날은 얼마인지 모를 시간 동안 내내 울리는 알람을 아예 듣지도 못하고 잤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가지고 문득 잠이 깨는데 그대로 다시 잠들기를 서너 번 정도 하고 9시, 출근시간이 넘으면 일어나야 할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느낌이 들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도 바로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주가를 확인하고 전날 밤 잠들기 전에 보던 뉴스를 이어서 보고 더 이상 볼 게 없을 때쯤 되면 몸은 충분히 개운지고, 덕분에 정신이 맑아지면서 또 하루를 이렇게 한심하게 시간을 죽이면서 시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왜 알람이 울렸을 때 바로 일어나지 못 했을까, 하는 일도 없는데 왜 아침에 눈 뜨는 게 힘들까, 그러게 어젯밤에 눕자마자 바로 잘 것이지 핸드폰은 왜 들여다 봤을까, 이 정도면 핸드폰 중독인가. 결국 내 속에서 ‘어우, 이 세상 쓸모없는 것아’ 하는 소리가 들려야 침대를 벗어날 수 있는 거다.
매일 아침 반성하고 잠들 때마다 결심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출근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가야 하는 건가. 나태하기 싫지만 부지런하게 살고 싶지도 않은데. 아마 그래서겠지. 이유가 없어서. 굳이 세상 돌아가는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없긴 하다. 회사를 다니기 싫어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길을 찾는 중인데 굳이 회사생활 하듯히 살 필요가 없지. 오히려 회사다닐 때와 전혀 다르게, 나의 본성에 충실하게 살아보는 게 좋겠다. 게다가 자발적 백수생활 2개월차니 좀 더 게으름을 즐겨도 되지 않겠나. 밤낮이 바뀌어 생활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기만 하면 말이다.
전날 밤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뒤져보다가 ‘건강한 생활리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어나서 30분 이내에 밖으로 나가라’는 글을 본 게 기억났다. 이미 눈 뜬 지 한 시간이 지났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칫솔을 물고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칫솔질을 했다. 손바닥만 한 마당으로 볕이 쏟아지는 걸 보니 해는 벌써 중천에 오른 모양이었다. 낮 동안 뜨겁게 달궈진 집은 밤에도 식지 않는데 거기에 매일 새로 뜨는 해가 열기를 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어컨을 틀까 하다가 금방 나갈 거니까 말았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환기를 하는 게 낫겠다 싶어 문을 열었다. 대충 지어서 오래된 집 안에는 열기 외에도 눅눅한 냄새가 가득했다. 칫솔질을 하면서 마당에 섰다. 심은 적도 없고 돌봐주지도 않는데 옆집과의 사이에 있는 담장 꼭대기부터 마당 안쪽으로 흘러내리듯 자란 담쟁이 몇 줄기에서 이파리들이 살짝살짝 움직이며 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디로 가지?
동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내라고 불리는 중심지가 있고 돌담길도 있지만 서울의 도심과 정동길을 떠올리면 안 된다. 지역의 규모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세력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작은 도시에서는 가장 번화한 중심지라고 해도 그중에 큰길 정도만 정말로 번화하고 이면부는 대부분 조용하다. 번화가에서 길 하나만 건너도 낮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좁은 골목에 저층의 집들이 빼곡하게 붙어있는 풍경을 보게 될 확률이 높다. 우리 동네도 그렇다.
원래 별 거 없고 그래서 별다른 일 없는 동네가 요 며칠 달라 보였다. 그런데 내가 그 동네에 산지는 이제 2년 정도 됐으며 회사 다니면서 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 늦게 돌아오면서 본 게 다고, 딱히 관심을 갖고 동네를 지켜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평소와 뭐가 다른지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 동네는 늘 이랬는데 그날 문득 내가 다르게 느낀 건가 싶기도 했다. 여태 동네에서 본 적 없는 것 같은 경찰이 몇 명 길에 서 있고 순찰하는 경찰차도 보여서 교통단속을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가 정돈된 느낌이 드는 건가 하면서.
버스가 다니는 4차선의 도로를 건너면서 이제 우리 동네를 벗어나 시내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왕복 4차선이면 대로도 아니고 중로에 속하는 데다가 더 멀리 연결되는 더 넓은 도로도 여럿 있지만 시내를 관통하고 그래서 버스 노선도 집중되는 그 길이 이 도시의 진짜 중심도로인 것 같다. 게다가 3차원의 도시공간에서 보자면 도시의 중심지와 그 외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길을 건널 때마다 시내에 간다,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하면서 정의하곤 한다. 시내에 가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따라 걷다가 거의 끝에 다다를 때쯤 이면골목으로 들어가서 다시 거기에 붙어있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끝에 있는 국밥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으며 어디로 갈지 생각하려고. 식당은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한산했다. 가게의 제일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벽에 기대고 앉아 국밥을 주문했다. 회사 다닐 때 가끔 시내에 일 보러 오면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오곤 했는데 늘 빈자리 없이 손님이 꽉 차서 시끌벅적했었다. 식당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고 단지 조용하기만 한데 처음 오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회사 밖의 세상이 익숙하지 않아서인가. 곧 테이블 위에 국밥과 반찬이 놓였고 나는 바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어이, 이게 누구야!”
김 부장. 감정을 싣지 않고 말하자면 예전 직장 상사였다. 여기서 만나다니.
“잘 지내나 보네. 하는 일은 잘 되고? 아, 그런데 뭘 하고 있어?”
숟가락을 그대로 내려놓고 식당을 나왔다.
발단
누군가는 나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게 다 김 부장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말기 암 환자인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세 달 휴가를 내겠다고 했을 때 김 부장은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면서 욕을 했다. 나는 교양있고 선량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결코 쓰지 않을 뿐더러 남의 욕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서라도 입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순화해서 표현하면 제정신이냐, 네 일을 누가 하냐, 여태 봐줬더니 배은망덕하다, 정도가 되겠다. 전 직원이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작은 회사 안에서, 우리 아버지가 간암에 걸렸고 이미 위와 폐와 척추까지 암세포가 번져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는 생활과 회사 일을 병행하느라 초주검이 되어 사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십 년 동안 불평 없이 남들보다 어려운 일을 더 많이 시켜도 다 해냈는데. 못 간 휴가일수와 수당 받지 않고 일한 주말근무일수를 합하면 세 달이 넘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 부장이 나를 봐준 건 없는데. 그렇다면 사표를 내겠다고 하기 전에 대표님이 사정을 알게 되었고 직접 휴가를 허락해서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드릴 수 있었다.
“그런다고 뭐 달라져?”
그 말이 제일 원망스러웠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겠다는 게 아니라 생의 마지막이 끔찍하지는 않기를, 조금이라도 평온하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거였다. 아버지도 나도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경기도 어느 도시의 암센터 좁은 병실에서 아버지와 나는 한 달을 같이 지냈다. 내 사정을 아셨는지 아버지는 의사가 말한 세 달을 채우지 못하고 한 달 만에 급히 가셨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나와 같이 일하던 정 대리가 김 부장의 이름이 적혀 있는 조의금 봉투를 내밀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장례가 끝나면 바로 출근하라고 김 부장이 꼭 전하라 했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정 대리를 보니 내가 다 미안했다.
다시 출근하고 나서도 김 부장은 툭하면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주로 잘해줘 봐야 아무 소용없다, 일 이전에 사람됨이 중요하다, 뭐 그런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딱히 내 잘못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서 내 얘기 같지도 않고 너무 원색적인 비난이라 차라리 무시할 수 있었다. 김 부장의 말도 안 되는 짜증과 신경질을 이전에 충분히 겪어 왔기도 했고. 아마 다른 직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고 그랬을 거다. 앞으로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이 있어도 연차 휴가 외에 휴가의 ‘휴’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려고. 한편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지적받는 모습을 자주 연출함으로써 나를 무능력자로 매도하려는 전략이 있었겠지. 김 부장은 일을 잘 못했으니까. 그는 중요한 법률 검토를 꼼꼼하게 하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바뀌는 정부의 정책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아랫사람인 나보다 일을 못한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게 드러날 까 봐 전전긍긍했다. 사실 나 말고는 그런 상황 파악이 될 정도로 능력이 있는 직원은 없었는데.
처음에는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김 부장을 욕하던 직원들도 점점 모른 척하게 됐다. 괜히 내 편을 들다가 김 부장한테 눈 밖에 나면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까 봐 그랬겠지. 이해했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 직원들이 선뜻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을 만큼 내가 그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회사에서 어렵고 많은 일을 해내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내가 최대한 많이 하는 거였다. 업무를 잘 나눠주고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고 보완사항을 짚어주는 건 또 다른 일이다. 몇 달 동안 같이 일하면서 일을 가르쳐 팀원의 역량이 향상되면 회사에서는 그 직원에게 따로 다른 일을 시켰고 자신감이 생긴 팀원은 더 좋은 회사를 찾아 떠나기도 했다. 그걸 몇 번 겪고 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내 근무조건은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후에, 나는 오직 내 일을 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쓰기로 했다. 상급자 이전에 업계의 선배로서 천둥벌거숭이 같은 팀원들에게 조언의 해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것도, 동기들과 술 마시며 회사와 업계의 불편부당함에 대해 토로하는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동료들과 부정적인 감정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나아질 게 없고 차라리 그 모든 게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채로 오직 일만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 말고 다른 건 전부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흘려보내면서 살았는데 어쩌면 그러는 동안 어느 동료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 걸 내가 귀 막고 눈 감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틀리진 않지만 정답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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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지만 김 부장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별생각 없이 일만 하면서 회사를 다니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회사에 다니지 않는 삶을 모색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서글프지도 김 부장이 원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날 그가 불쑥 나타나서 나의 점심을, 그날 하루를 다 망친 건 분명했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슬펐다. 종일 아버지 생각이 떠나질 않아서. 아버지의 마지막이며 아버지와 내가 처음으로 온전히 함께 보낸 한 달의 시간만 반복해서 떠올랐다. 온몸의 살이 빠지고 뼈가 다 드러나서 쭈글쭈글한 갈색의 마른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걸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이, 가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편해지면 나를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던 바람 새듯 기운 없는 목소리가, 말을 할 수 없어서 그저 나를 바라보던 눈물 고인 슬픈 눈빛과 내 손을 잡은 빳빳한 손의 감촉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슬펐다.
아버지는 미안할 일이 하나도 없는 분이었다. 본인 스스로에게도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아버지의 삶에는 성실함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모진 말 한 번 안 했고 세상에 티끌만큼이라도 해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참는 게, 양보하는 게, 손해 보는 게 마음 편하다고 늘 말했다. 그 나이대의 여느 아버지들만큼 무뚝뚝하고 살가움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늘 아버지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든 우리 아버지를 안다면 나와 같이 생각할 거라고. 그래서 아버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바쁘다고 신경도 안 쓰고 혼자 살다가 이제야, 아무것도 못 해드리고 겨우 곁에 있기만 하는 나에게 뭐가 미안하다고.
“아버지, 아버지는 잘 사셨어요. 어느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실 필요 없을 정도로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활짝 웃는 아버지를 마주 보면서 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다 아는데 굳이 말해서 뭐하냐 싶겠지. 손을 잡는 것도 영 쑥스럽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러지 못해서 얼마나 미안하고 안타까운지는 알 수가 없겠지.
그대로 잠자리에 들면 밤 새 뒤척일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갔다. 늦은 시간이지만 몸이 충분히 지칠 때까지 달리고 싶어서 시내를 가로질러 한참 달려서 하천변의 산책로까지 갔다. 후끈한 밤공기가 제법 세게 밀려와 부딪쳤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산책로를 달렸다. 얼른 지쳐서,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나면 좋겠는데 아버지의 기억이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슬픈 기억을 행복한 기억으로 덮어 보려고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초등학교 운동장을 뱅뱅 돌던 때, 남의 집 장미꽃밭 한가운데 나를 세워 놓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사진 찍던 때, 엄마의 심부름으로 아버지와 손잡고 번데기를 사러 가던 그때 겨울의 밤 풍경이 떠오르고, 시장에서 홍시 두 개를 사서 하나씩 나눠 먹다가 어린 내가 입이며 손이며 온통 묻히면서 먹는 걸 보고는 난감해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였던 때의 아버지. 홍시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거였다. 명절에 친척들 다 모인 데서 아버지는 늘 내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 이름 앞에 항상 “우리”를 붙여서 불렀었는데. 어른이 된 이후에는 아버지와 함께한 특별한 기억이 없어서 결국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다시 출근을 하고 김 부장…….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끝에 김 부장이 있는 건 화가 나네.
“김 부장 이 자식,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