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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월 Mar 03. 2023

다시, 시작

[ 짧은 글 ]


우리 집 꽃밭과 긴 권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잘 자라던 국화 수십 그루가 갑자기 다 죽어서 꽃을 못 본 이후로 손대기는커녕 들여다보지도 않았거든요.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으니 배신당한 것 같고 허무하고 그랬습니다. 사실 정말 속상하고 힘든 건 국화였을텐데 말이죠.


그 사이 마당을 내다볼 때마다 높은 담장 위로 담장 높이만큼 불쑥 솟아오른 고층 오피스텔이 꼴 보기 싫고, 앞 건물의 거대한 실외기들이 골목에 비행기소리 같은 소음 폭격을 날리고 있어서 얼른 문을 닫아버리곤 했습니다. 이제 마당 구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만사가 다 싫고 해 봤자 뭐 하나 싶은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서 뭘 할까 하다가, 느닷없이 꽃밭을 정리했습니다. 땅을 온통 뒤엎은 잡초를 뽑기는 어려워서 대충 뜯어내고 말라비틀어진 가지들은 삭발 수준으로 자르고 뿌리가 드러난 부분에 흙을 덮은 후 물도 뿌렸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가시에 손이 긁히고 옷이 뜯기면서 한 시간이 훌쩍 가도록 힘든 줄 몰랐습니다.


예년보다 꽃이 늦네요. 볕이 적어서 스산한 날씨가 계속된다 싶더니 식물들도 그렇게 느꼈나 봅니다. 지금쯤 꽃을 피워야 할 크로커스는 가느다란 이파리 몇 개를 겨우 내밀었고, 꽃봉오리 맺을 준비가 한창이어야 할 수선화도 아직 아기아기 합니다. 꽃다발에서 가지를 잘라 무작정 꽂아 놓은 애플 뭐시기가 무사히 겨울을 나서 놀랐네요. 미니장미도 꺾꽂이에 성공했고요. 영산홍은 이파리를 제법 남겨 놓은 채 겨울을 버텨내 기특하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라일락은 곧 마법처럼 새 이파리를 터뜨릴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걱정 없죠. 백합과 튤립은 더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 건지. 전멸한 국화는…….


꽃밭 정리를 끝내고 나니 날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바로 달리기 하러 나갔네요. 신천변을 달리면서 하늘이 청록색이다가 주황색으로, 진홍색으로, 보라색으로 점차 변하다가 결국 남색이 되어 짙어지는 걸 보았습니다. 좋더군요. 한 시간 운동하고 세 시간 쉬어야 했지만.


식물이 주는 힘이 놀랍습니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다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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