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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를 신뢰하라는데 이게 맞나요?

제대로 신뢰하는 법

by 화랑

늦겨울의 밤공기는 익숙해질 틈도 없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여러 차례 접은 탓에 두툼해진 지도, 내 위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장갑 낀 손으로 지도를 더듬어 가며 졸린 눈에 힘을 주었다. 추위 때문인지 혹은 이 거대한 엔진의 진동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도무지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지도를 보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던 중 우리 소대의 선두 단차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전방 00일대에 적 보병 식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우리가 적을 먼저 식별했으니 공격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생겼다. 어느 전쟁영화에서 본 것처럼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선제공격에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터라 나는 안도했다.


조준경을 앞쪽으로 돌려보니 선두단차가 보고한 적 보병들이 어렴풋이 내 시야에도 들어왔다. '드디어 첫 총성이 울리겠구나.' 선두단차에 공격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내 소대 앞에는 우리보다 먼저 진출해 있는 아군 보병들이 있었다. 나는 급히 그 보병 부대를 호출했다.


"A팀, 혹시 현재 위치가 00인가?"

"아니라고 알림. 현재 A팀 위치는 ㅁㅁㅁ임."

"00에 없는 것이 확실한가? 현재 00에 신원미상의 보병이 식별됨."

"정확함. A팀은 00이 아닌 ㅁㅁㅁ에 있음!"


'분명 A팀이 이전에 했던 위치보고에 의하면 저 위치가 아닐 텐데? 그 사이에 더 멀리 진출했나 보군! 설마 자기 위치를 잘못 파악했겠어' 더 이상 말성일 것이 없었다. 나는 곧바로 선두단차에 공격 무전을 날렸다.


"귀소가 식별한 것은 적 보병임. 격멸할 것!"

"수신완료. 다 죽이겠음!"


'다 죽이겠음'이라니... 엄밀히 따지자면 부적절한 무전용어였지만 나는 선두전차장의 이러한 위트를 좋아했기에 혼자 그 대사를 되뇌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이어 들어온 무전이 나의 미소를 완전히 깨뜨렸다.


"소대장, 여기는 A팀. 아... 위치 재보고 하겠음. A팀 현 위치는 ㅁㅁㅁ이 아닌 00이 맞음. 현 위치는 ㅁㅁㅁ이 아닌 00이 맞음."


당장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선두단차의 무전이 들어왔다.


"쏴!"


이는 임관 후에 실시한 나의 첫 모의훈련이었다. 실제로 총구가 화염을 뿜는 일도, 내가 지켜본 조준경 속 사람들이 쓰러지는 일도 없었다. 다소 허무하게도 이 일은 현장 심판역할의 통제관님 판단으로 아무런 피해발생 없이 훈련을 지속하게 되었고, 나를 포함한 소대원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부하를 믿고 신뢰하라" 리더십 시간에 배운 참된 리더의 여러 덕목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구의 표면만 이해한 것이었다. 이를 실전 버전으로 재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부하를 신뢰하되, 먼저 그가 신뢰받을만한 유능함을 갖추었는지 파악하라. 그리고 그 이전에, 나는 그 유능함과 무능함을 알아볼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당시 A팀장도, 나도 초급간부였다) 부하가 신뢰할만한 실력이 없음에도 주는 신뢰는 그저 무책임한 책임전가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실력을 알아보는 통찰력이 부족하다면 잘못된 신뢰와 불신으로 무장한 무능한 리더가 될 것이다. 결국은 통찰력을 위한 깊이 있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자기 객관화가 필수적인 것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것들이 말로는 참 쉬운데 실제로는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부하가 유능하고 상급자가 현명할지라도 사람은 누구가 실수를 한다. 따라서 부하와 상급자 서로를 위해서 최소한의 점검요소들은 필수이다. 다만 이것을 정말로 '최소화'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배웠던 부하와 상급자 간의 올바른 신뢰관계인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한 원칙들을 스스로 잘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아군에게 오인사격을 하기 이전까지는...


누군가에게는 다소 과장하여 표현된 작은 일화일지 모른다. 하지만 초급장교이자 사회초년생이었던 이 청년에게는 하나의 소중한 성장통이 되어준 귀중한 경험이었다.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면, 어쩌면 실전이었다면 굳이 아군인지 확인하는 무전할 틈도 없이 곧바로 사격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 무전을 하는 순간 적이 우리를 보고 먼저 공격했다면 나의 신중함은 망설임이 되었을 것이고, 그 망설임은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다.(그래서 애초에 피아식별 대책을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훈련 상황이 아니라 업무를 협조할 때에도 신뢰에 대한 배신을 당한 경험이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분명히 오늘까지 해주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같은 상황이 있겠다.) 이럴 때에는 아무리 상대방 잘못이 100%일지라도, 결국 그 결과로 인한 피해와 책임은 나에게 생기는 법이다. 따라서 신뢰관계가 충분하지 않은 사람과 업무를 협조하는 일이 있다면 번거롭더라도 세세하게 어려차례 재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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