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랍 속 필름 이야기

어느 기억의 틈에서

by 마루

내 서랍 속 필름 이야기 — 어느 기억의 틈에서




문득, 서랍을 열었다.

거기…

고요히 잠든 필름 한 통.

FUJIFILM 200.

이름만으로도 쓸쓸한, 그리고 따뜻한 감정이 밀려온다.


요즘은 셔터를 누르면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빛도, 구도도, 감정도 실시간으로 피드백받는 시대.

그런데…

그건 너무 빠르다. 너무 똑똑해서 차가운.


필름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 서툴고, 느리고, 기다려야 했다.

빛은 한 컷에 스며들었고, 마음은 그 순간을 믿어야만 했다.

‘잘 찍혔을까?’

확신 없는 따뜻함.

그게 필름의 온도였다.


이제 그 필름은 더는 쓸 수 없다.

현상소도 찾기 어렵고,

카메라도 구석 어딘가 먼지가 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그 쓸 수 없음이, 이토록 간절한 건.


사진 한 장에 담긴 건 장면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였다.

디지털은 시간을 ‘저장’하지만

필름은 순간을 ‘살아냈다’.


불빛 아래, 아웃포커스된 세상이 흐릿해질수록

그 중심의 필름만은 선명하다.

아날로그의 마지막 인사처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기억하고 싶어서 찍은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었던 순간이 찍혀 있었지.”





작가의 말


“빛이 닿기 전, 그 감정”


디지털은 늘 정확하다.

하지만 필름은, 늘 조용하다.

확실함 대신 기다림을, 선명함 대신 여운을 남긴다.


나는 이 사진을 통해

쓸 수 없게 된 필름이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을 품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빛을 기다리는 감정.

흐릿한 배경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중심.

아날로그는 사라진 게 아니라

조용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장면을 쉽게 찍는다.

그러다 중요한 한 컷을 잃는다.


이 작업은 나에게,

‘잊지 않기 위한 느림’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그 느림을 사랑했던 모두에게 바친다.




– 2025년 어느 여름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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