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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사라진 글자 속에 나를 비추는가

기억의 언어

by 마루


비어 있는 것을 채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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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언어는 한글로 완성되었다.
논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우리의 소리를 가장 정직하게 담아낸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한자(漢字)**라는 오래된 그림자를 불러낸다.
그 이유는 통치의 질서나 이성의 수양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여백을 채우기 위한 기억의 행위다.

한자를 쓰는 일은 과거를 흉내 내는 복고가 아니라,
잃어버린 감정의 결을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가 부르는 한자의 숨결은 이제 기억의 언어가 되었다.

‘心(심)’과 ‘마음’ 사이의 간극

‘마음’은 지금의 언어다.
살아 있는 감정, 즉각적인 떨림이다.
사랑, 슬픔, 기쁨이 그 안에서 요동친다.

그러나 그 옆에 ‘心’을 적는 순간, 감정은 사유로 바뀐다.
한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시간의 퇴적층을 가진 상징이다.

중국의 ‘心’이 하늘의 반사체였다면,
조선의 ‘心’은 도덕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지금 우리의 ‘心’은 그 모든 시대의 잔향을 품은 채,
나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것은 옛 도덕이나 고전을 향한 향수가 아니다.
그저 지금의 감정에 더 깊은 음영을 부여하는 행위다.
‘心’을 쓰는 일은 곧,
감정에 사유의 빛을 덧입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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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 '愛'를 호출하는 이유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따뜻하지만,
때로는 너무 쉽게 닳는다.
그 단어 하나로는 담기지 않는 애틋함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愛’를 불러낸다.
‘사랑’이 현재의 감정이라면,
‘愛’는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온 감정의 원형이다.

조선의 ‘愛’가 도덕의 의무였다면,
지금 우리의 ‘愛’는 순수한 사색의 언어다.
그건 도리나 규범이 아닌,
존재 자체로 의미가 되는 인간 내면의 그림자다.

우리는 ‘愛’를 통해
잃어버린 숭고함과 한때의 따스한 체온을 번역한다.
그 순간, 언어는 단어를 넘어
기억을 복원하는 장치가 된다.

언어의 여백, '空(공)'이 주는 위로

‘비어 있음’은 결핍이 아니다.
한자 ‘空’은 단순한 Nothing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여백이다.

‘空’은 고요한 가능성의 언어다.
가득 찬 것들 속에서
우리는 숨 쉴 틈을 잃는다.
‘空’은 그 틈을 만든다.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우리는 ‘空’을 쓴다.
논리의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감정의 쉼표를 위해.
그것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사색이며,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한 줄기 숨결이다.

세대를 꿰매는 언어의 생명선

한자는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 오랜 선(線)은 세대와 나라의 시간을 꿰매며,
지금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우리는 이 글자를 빌려
감정을 번역하고, 내면을 성찰한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시대마다 다른 하늘을 비출 뿐이다.

지금 당신이 마음속에 떠올리는 한자는
어떤 하늘의 색을 띠고 있는가.
그 속에는, 아마도
당신이 잊지 않으려는 인간의 그림자가
조용히 머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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